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 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요? 반복되는 삶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학입니다. <포르모사 문학관>에서 타이완 특유의 문학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포르모사 문학관> 시즌2의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지난주 타이완문학관이 주최하는 국가급 문학상 ‘2023 금전장(金典獎)’의 수상작을 대략적으로 소개해 드렸는데, 오늘은 올해의 대상 수상작인 천례(陳列, 본명 陳瑞麟 천뤠이린)의 에세이집 《잔해서(殘骸書)》에 대해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년의 대상 수상작 라이샹인(賴香吟)의 소설 《하얀 초상화(白色畫像)》에 이어 올해 금전장은 또 한 차례 타이완 백색테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선택했는데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픽션 요소를 넣은 《하얀 초상화》와 다르게, 백색테러 피해자인 천례는 일인칭 시점을 통해 자신이 피해를 당한 과정, 그리고 고통에 얽매인 세월을 여실히 기록했습니다.
1949년 계엄령 발포 후부터 1987년 계엄령 해제 때까지 38년 동안 이어진 타이완 백색테러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책 한 권, 편지 한 통, 전환 한 통, 또는 아무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누려야 할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타이완 남부 쟈이(嘉義) 출신인 천례는 대학교 졸업 후 동부 화롄(花蓮)의 한 중학교에서 2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가 대학원 진학을 위해 교직생활을 접고 한 사찰에서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1972년 1월 쌀쌀한 겨울 밤, 까맣게 입은 요원들이 산속의 사찰에 찾아가서 천례를 심문했습니다. 3개월 후 천례는 ‘공비를 위해 선전했다(為匪宣傳)’는 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투옥되었습니다.
공비를 위해 선전했다는 죄목은 도대체 무슨 죄일까요? 민주화 이후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천례가 교사를 그만두기 전 한 수업에서 학생들이 “나중에 군대에 가면 중국 대륙을 수복하기 위해 그쪽으로 파견되지 않겠느냐”고 묻자 천례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때문에 천례는 타이베이 징메이(景美)에 있었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한창 청춘인 26살이었습니다.
천례는 《잔해서》에서 “입감된 첫날, 화롄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베이까지 갔던 과정에서 두 사람이 나를 붙잡고 감시했다. 법정에서는 장난처럼 형식적인 질문과 대답만 했다. 수감소에 들어가 몸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서 감방에 갇혔다. 감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복잡한 눈빛과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전혀 저항할 수 없는 무력감, 정말 감옥에 갈 것 같다는 생각에 한없이 떨리는 마음, 체면을 위해 침착한 척하는 강요… 지금 생각해도 무척 선명하고 나를 슬프게, 아프게 한다. 긴 세월이 지난 후 이러한 경험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떤 것들은 그때부터 점점 죽어가고 어떤 것들은 소리 없이 자라고 나를 갉아먹는다.”고 작성했습니다.

백색테러 피해 과정을 기록한 천례의 최신작 《잔해서(殘骸書)》- 사진: Eslite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천례는 잊어버리려 하는 두 차례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첫번째는 감옥에 있었을 때입니다. 그는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한 수감 과정을 기억 밖으로 내쫓았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도, 생각하지도, 느껴보지도 않았습니다. 독서 이외의 시간에 자신을 ‘무념무상’의 상태에 몰아넣고 내면의 모든 생각을 의도적으로 억눌렀습니다. 1975년 장제스 전 중화민국 총통이 사망한 후 그는 7년에서 4년 8개월로 감형되었습니다. 수의를 벗고 사회로 복귀했지만 커다란 고통은 여전히 기억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해 그는 오늘날까지도 감옥에서 어떻게 빨래했는지, 옷을 말렸는지, 이불은 어디에서 받았는지 등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는 ‘해리성 기억상실(dissociative amnesia)’을 언급했는데요. 해리성 기억상실은 심리적 원인에서 발생하는 기억상실증으로 중요한 개인적 정보 또는 경험을 갑자기 회상하지 못하는 장애입니다. 천례의 증상은 해리성 기억상실에 속하는지는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아픈 기억을 잊기로 하고 스스로를 보호벽 안에 가두었습니다.
다만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입니다. 천례는 감옥에서 미래의 장모 쉬메이(徐美)를 만났습니다. 장사를 하던 쉬메이는 어느날 세무조사를 받은 과정에서 지갑 안에 타이완 독립운동의 대표인물인 스밍(史明)의 명함이 있는 것을 조사원에게 들켜 ‘타이완 독립 주장’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쉬메이는 감옥에서 영어에 능통한 천례에게 영어를 배우며 점차 친분을 쌓았고, 자신보다 일찍 풀려나갈 천례에게 딸 리이칭(李翊青)을 소개시키로 했습니다. 천례가 출옥 후 리이칭과 금방 가까워졌고 쉬메이가 석방되기 전 바로 결혼했습니다.
국가인권박물관이 공동 출판한 타이완 백색테러 소설집에 따르면, 사회에 복귀한 뒤 천례는 사람들과 관련되는 일을 최대한 삼가고 혼자 작업을 할 수 있는 번역에 종사했습니다. 천례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관계를 맺고, 신분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칠 가능성이 낮으며 이처럼 숨겨진 존재는 바로 내가 원했던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두려웠던 천례는 아내의 격려로 수감생활에 관한 에세이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1980년 〈무원(無怨)〉, 1981년 〈지상세월(地上歲月)〉, 1991년 《영원한 산(永遠的山)》, 2014년 《주저의 노래(躊躇之歌)》 등 작품을 통해 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했습니다. 2018년 문학지 《염분지대(鹽分地帶)》가 발표한 ‘타이완 10대 에세이 작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10년 천례는 징메이 수용소와 함께 ‘타이완 2대 정치범 수용소’라 불리던 뤼다오(綠島) 수용소에 갔습니다. 외딴섬 뤼다오에서 그는 아픈 추억의 공포를 새삼 느끼며 “굳이 상처를 꺼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는데요. 백색테러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했지만 자신을 아프게 할까봐 망설였죠. 그러나 신기하게도 포기할 뻔한 시점에 국가인권박물관의 초청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직면하지 못했던 창작 계획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년 동안 그는 자신이 수감되었던 옛 징메이 수용소, 현 징메이 인권단지에서 글을 쓰면서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이 창작 계획은 이행기 정의, 또는 과거사 청산을 추진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동시에 문학을 통해 피해자를 치유하고 불의에 대항하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망각과 기억,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떨쳐 버릴 수 없는 불쾌감… 《잔해서》를 쓴 동안 천례는 언제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처해 있었다고 했습니다. 영영 사라지지 않는 아픈 기억들은 잔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산산조각이 된 피해자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천례는 “《잔해서》는 쓰라린 고난을 되새기거나, 부정부패를 폭로하거나, 피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의 반항, 의지, 자유, 존엄을 찾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금전장 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잔해서》는 타이완 문단에 아주 중요한 작품입니다. 앞으로 한국에서 출판되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르모사 문학관>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陳列,《殘骸書》。
2. 凃盈如,「陳列《殘骸書》出版 以一個人的遭遇,填補了一個時代的蒼白」,自由時報。
3. 邱祖胤,「陳列書寫「殘骸書」 發現反抗、志氣、自由與尊嚴」,中央社。
4. 謝達文,「現場》直面白色恐怖,寫出遺落的歷史——陳列談《殘骸書》」,OPENBOOK閱讀誌。
5. 陳銘城「難友徐美變岳母,作家陳列坐牢結良緣」,Newtalk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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