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상처-천안문사태 35주년
- -1989년6월4일 천안문사건, 올해 35주년
- -중국 대륙, 홍콩 등지에서의 관련 기념 일체 금지
- -천안문의 어머니들의 호소
- -중공당국자들이 절대 거론하지 않는 민주화운동
- -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은 90년 타이베이 들백합학생운동이 일어난 간접적 요인으로 작용
-2024.06.03.-타이완 ㆍ한반도 ㆍ양안관계 ㆍ시사평론-
1989년, 당시 중화민국의 대외 방송은 ‘자유중국의 소리’였다. 베이징정권의 정치체제와 달리 타이베이는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였고, 그래서 그때 우리는 ‘본토수복’의 방법을 민주주의 제도로써 달성하려는 구상도 가졌었다. 베이징이 일당독제가 아닌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을 할 수 있도록 타이베이에서 관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양안간이 정부와 민간 모두 두절된 지 근 40년 만에 왕래가 가능해질 때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방식으로 중화민국이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었다. 1949년을 전후하여 난징의 국민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온 국군들은 거의 다 노년이 되어 있었고 양안간의 협상이 이뤄지며 고향땅을 그리워하던 퇴역 장병들이 자유로이 그들의 고향을 방문하고 친지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실로 감동이었고 양안간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동족애의 정이 오가며 화기애애하였다.
그러한 시기에 중국대륙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베이징 뿐 아니라 상하이 등 대도시에 학생들과 근로자들이 집회를 하며 베이징의 고위층들을 당황시켰다. 군중 집회에 앞서 그 계기가 될 만한 일이 있었다. 바로 1989년 4월15일 중공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별세와 관련이 있다.
후야오방은 1987년1월 총서기 직에 있을 때 내부 투쟁으로 실각하며 하야했는데 2년여 후인 89년4월15에 별세하였다. 그래서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그를 애도하는 추도객들이 대거 모이며 대형 집회가 이뤄졌고 그게 또 민주화운동으로 변화하였는데 6월4일 뜻하지 않은 유혈 진압사태가 일어났고 ‘89년 64천안문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후야오방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1억 명의 정치 천민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인도주의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른바 ‘정치 천민’이란 지주와 부농과 같은 사람들이 문화혁명 기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희생을 받았던 사람들을 지칭한다. 전 중공총서기, 국무원 총리 자오즈양(趙紫陽)도 유혈진압을 반대하여 권력 핵심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중국의 지식층들은 그를 ‘중공 지혜의 대뇌’라고 불렀고, 후야오방을 ‘중공의 선량한 심장’이라고 칭송했다.
89년 64사태 당시 타이완에서는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 예의주시하며 민주화운동에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64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인 5월18일 당시 집권 중국국민당은 성명을 통해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자유화는 불가항력한 세계적인 흐름이며, 삼민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타이완 경험’을 창출해 냈다’며, ‘대륙의 지식층이 앞장 서 추진하는 민주화 운동에는 언론인들과 상공업 및 농민 그리고 중공의 간부들도 참여하였고 중공군대에서도 동정을 표하는 등 민주, 자유, 인권을 쟁취하는 큰 물결이 일었는데, 우리는 각종 방식과 채널을 통해 그들에게 최대한의 지지를 보낼 것이며, 이 민주화운동은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64유혈진압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기에 타이완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성원하며 연합서명을 하였고, 각 대학교에서도 집회를 통해 성원하였었다. 정부 고위층들도 각종 방식으로 중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전국적으로 말로만 성원한 게 아니라 모금활동과 필요한 물자 제공을 위한 각종 기부가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학생과 모든 시민들을 지지한다는 것 외에 중공당국이 무장한 군대를 출동시킨 것, 그리고 모든 뉴스를 차단한 것 등을 질책하였고, 중공당국이 즉각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실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문화예술계에서도 당대 최고의 성악가, 무용가, 연극감독 등이 모금활동과 집회를 거행하며 중국 민주화운동을 돕는 데 발벗고 나섰다. 35년 전을 회상하면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양안간은 그저 동족이고 가족이라 여겨졌을 때였다.
2019년, 64사건 30주년을 들여다 볼 경우 89년과는 완연 다른 분위기였다. 이때 양안간의 심리적 거리는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또한 양안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처리하는 방식도 상당히 달랐다. 타이완에서 1947년에 발생한 ‘228사건’과 그 후로 사상과 언론을 탄압했던 ‘백색테러’의 과오에 대해 중국국민당정부를 대표하여 리덩후이와 마잉주 모두 역사 사건을 직시하며 공식 사과를 하였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하였다. 그 반면 중공당국은 ‘64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그 누구도 거론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들의 활약이 매우컸다. 하지만 정부와의 대치에서 희생자들도 적지 않았다. 매우 과격한 민주 쟁취 과정인데 반해 타이완의 학생운동은 다소 조용한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런데 89년 천안문사태 이후 1년 뒤인 1990년 타이완에서 들백합학생운동이 폭발했다. 화인(華人)민주서원 책임자, 국회감시 시민운동 이사장 정졘위안(曾建元)은 천안문사건을 회상하며 타이완 사회 배경을 설명했다. 1989년 타이완은 ‘국가동란평정시기’조례를 적용하여 ‘계엄령’을 실시한 지 장장 38년 만에 계엄을 해제하고 진정한 정치 민주화, 언론 자유화 등을 향유하였던 초기였다. 당시 지식층들은 타이완 사회는 언론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중국대륙의 학생들이 89년도에 민주화를 추구했던 것과 유사한 성격을 띄었고 같은 중화민족이라는 감정이 바탕이 되어 천안문광장 민주화운동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원했다며, 그러나 당시 중화민국의 국회는 ‘만년 국민대회’라는 불명예스러운 점이 존재하고 있어서 민주주의 진영에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진정한 민주화가 정착하지 않았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면서 그래서 1990년, 타이완에서 들백합학생운동이 벌어졌고, 그건 어느 정도 89년 천안문광장에서 희생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타이완은 비록 이미 민주화의 길을 걷고는 있었지만 확실한 민주화를 위해 한 층 더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게 한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중국대륙과 홍콩에서의 64천안문사태 기념 활동은 일체 금지되었다. ‘천안문 어머니 캠페인’은 35주년을 맞이하며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 서한을 게재했다. 어머니들은 시진핑과 정부당국이 관련 문제에 관해 대화를 진행하기를 기대한다며 64참사는 중국정부가 반드시 직면해야 하고 국민들에게 설명을 해야할 사안이라고 지적하면서 90년 당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한 정부 관계자들은 반드시 법률적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표했다. 천안문의 어머니들은 정부당국이 성의껏 64참사를 그들의 의사 일정에 올려놓는 것 만으로도 아직 살아있는 희생자의 부모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게시물에 적었다. 이 공개편지에는 114명의 64사건 희생자 유가족의 연합서명이 있고, 73명의 이미 고인이 된 연합 서명인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었다.
올해 타이완과 영국 등지에서 문학과 예술로 64사건 35주년을 기념하는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89년 천안문사건 발생 후 타이완의 4대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 39명이 합창한 ‘역사의 상처’로 오늘 프로그램을 마무리한다. -白兆美
원고, 보도: 백조미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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