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상하이에서 지룽으로 향하던 여객선 조난사고
-2022.04.11.-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최근 국제 최대 이슈이로 이 때문에 타이완에서는 베이징이 타이베이에 대해서 무력 침범 시기에 대한 토론도 많아졌다. 하지만 오늘 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에서는 상호 대치하는 군인들의 싸움이 아닌 민간인 철수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와 황금 운반 과정에서 그 대형사고와도 다소 관련이 있는 근대사를 묶어서 짧게 분석 보도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1945년에 종전되었다. 8월15일은 한국의 광복절, 10월25일은 타이완의 광복절이다. 여기에는 중화민국의 광복절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대륙이 누구의 식민통치를 받은 적이 없고 나라를 잃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베이에서 말하는 우리의 광복절은 타이완 광복을 의미한다.
당시 중화민국 총통 장졔스(蔣中正장중정)는 곳곳에 침투해 중국땅을 좀먹고 있는 일본을 향해 1937년7월17일 루산(여산-廬山)에서 대일본 전면 항전을 선포하는 라디오방송을 했다. 그해 8월 공산당을 이끄는 마오저둥(모택동毛澤東)은 ‘근거지를 창조하고, 적을 견제 소멸하며, 전략적으로 우군 작전에 배합하고 홍군(紅軍공산군)을 보존하며 확대해 공산당이 민족혁명전쟁에서의 영도권을 쟁취한다’는 작전방침을 내세워 산간지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공산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장졔스정부의 국군은 대일한전 8년 만에 어렵게 승리를 거뒀지만 안타깝게도 곳곳에서 세력을 넓혀나간 공산당과의 정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6년부터 1947년 사이 당시 국민정부의 군대는 여러 곳에서 벌어진 공산당 군대와의 싸움에서 공산 세력을 거의 소멸하는 듯했다. 그런데 1947년9월부터 국공내전의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해 장졔스가 타이완으로 철수한 뒤에도 1950년8월까지 국공 전쟁은 계속 진행되었었다.
전투에서 실패한 장졔스 총통은 엄청난 통화팽창으로 인한 경제적 실패로 총통의 자리에서 물러났었다. 당시 부총통 이중런(李宗仁)은 총통 대행의 신분으로 내전을 종식하고자 1949년4월 공산당과 평화협상 담판을 베이핑(北平-지금의 베이징)에서 가졌는데, 공산당 측은 국민당정부가 항복하는 패배자의 자세를 요구하며 담판이 결렬되었다. 1947년 가을부터 승승장구해온 공산당은 협상이 파기된 후 해방군은 두쟝(渡江)전투를 발동하며 수도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 등 중부 연안지역 대도시를 함락했고, 이어서 몇 달 안에 대륙 중부와 남부 대부분의 지방을 공산당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이때 국군은 부단히 밀려나면서 남동부 연해지역과 남서부 아프카니스탄, 인도차이나반도와 인접한 지방으로 후퇴해 있었다. 그러다가 신장(新疆대부분 위구르족)이 1949년9월26일 국민당정부 대신 공산당정부를 택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같은 해 10월1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내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장졔스는 국공내전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 일단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철수한 후 나중에 다시 싸우겠다는 의지로 당시 중앙은행 금고 내의 황금을 타이완으로 실어옮기기 시작한 건 1948년11월말이었다. 장졔스가 타이완으로 건너와 다시는 중국대륙 땅을 밟지 못한 계기가 된 1949년12월로 보면 1년 전부터 철수할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으로 계산된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건 당시 장졔스는 전문가, 학자들의 철수를 적극 추진했다는 점인데, 그래서 비록 장졔스는 타이완을 부흥기지, 반공기지로 삼으며 언젠가는 본토로 돌아간다는 염원으로 이곳에 있었지만 타이완의 건설은 우수한 인재들이 함께한 덕분에 한걸음 한걸음씩 든든한 기반을 쌓아올리며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철수하던 선박의 침몰과 중요 문건
1949년1월27일 밤11시45분, 중화민국 중련(中聯)기업공사 소속 호화 여객선 ‘타이핑룬(태평륜太平輪)-이하 태평륜’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타이완 지룽(基隆)으로 항해하던 중 석탄과 목재를 실어나르던 화물선 졘위안룬(건원륜建元輪)과 충돌하며 두 척의 선박 모두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태평륜이 침몰한 건 2700톤이나 되는 화물을 실은 선박과 충돌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여기에 2가지 문제도 존재한다. 하나는 태평륜이 아무리 당시 호화 여객선이기는 하나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 아래 피란민들도 많고 실어옯길 것도 많아 선박의 적재정량을 훨씬 넘어서는 안전문제가 있었고, 역시 또 안전 문제로는 심야에 항해를 했다는 것이다. 상사이와 지룽 간의 거리가 아무리 멀지 않다고 해도 타이완해협을 건너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는 명나라 말기나 청나라 시대에 각종 이유로 타이완으로 건너오는 중국 이주민들이 민요로 부를 정도로 사실적 근거가 있다. 평소에도 건거기 어려운 해협을 한겨울, 저녁에 건너는 것 자체가 위험을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태평륜 여객선은 2천톤의 과적재 문제가 있었다.
태평륜 침몰사고로 숨진 사람은 선편 티켓을 소지한 508명의 승객과, 티켓 없이 탑승한 300명의 승객, 그리고 124명의 선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932명 외에도 해상에서 충돌한 건원륜 화물선에서도 72명이 사망해 모두 1004명이 선박 충돌사고로 사망하였고, 당시 호주 순양함( 34명), 중국 져장(浙江)성 저우산(舟山)군도 북부에 위치한 썽쓰(嵊泗)열도 어민들이 이름 모를 조난자들(10여 명)을 구했는데, 생존자는 모두 합쳐 50명이 안 되었다.
화물선의 석탄과 목재가 물에 가라앉았고, 여객선 내 대부분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적재량을 훨씬 초과한 이 여객선에는 600톤에 달하는 철강, 백톤이 넘는 신문사 인쇄기기와 신문 인쇄용지, 타이베이의 유명 상권 디화졔(적화가迪化街) 상점들이 주문한 귀한 약재와 비단 등 각종 제품과 오늘 방송에서 언급할 황금과 관련한 ‘중앙은행 중요 문건 1,317상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문건이 사라지면서 얼마만큼의 황금이 바다에 가라앉았다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은행의 문건 장부가 없어졌다는 것이라 후에 정확한 황금이나 은화 등의 숫자를 파악할 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외에 썽쓰 열도 어민들이 조난자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물 위에 많은 책이 담긴 궤짝들과 금은보화 장신구들 그리고 조상의 위패들이 있어 놀랐다고 했다.
조난사고에 관한 입증되지 않은 소문은 많다. 제일 유명한 건 국공내전과 관련된 것이며 특히 사고 여객선의 선주 5명 중 4명이 중국공산당 지하 당원이고, 사고 후 육지로 항행하는 도중 선박에서 폭발사고로 배가 뒤집혔으며 그래서 인명 피해가 컸다는 설이 한동안 파다했다.
태평륜에 탔던 거의 모든 사람이 사망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바닷물에 빠져 체온이 떨어져 숨진 사람도 이중 대부분이라고 한다. 사망자 가운데에는 원래 타이완으로 건너와 ‘국립음악대학’의 부지를 찾으려했던 유명 작곡가이자 음악교육가(우버차오吳伯超), 장징궈(장경국蔣經國)판공실 주임(위지위俞季虞-그는 장징궈가 구소련 유학시기에 아주 친하게 지낸 벗이기도 함), 형사 감정 전문가 리창위의 부친(리하오민), 전 랴오닝성(遼寧省) 성주석(쉬쩐徐箴), 타이베이 그랜드 모스크(이슬람교 예배당) 창립자(창즈춘常子春)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49년1월 타이완으로 건너오던 중 조난사고 사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륜 조난여객 기념비가 1951년 지룽항에 세워졌다.
황금 운송 작전(문헌과 유물 등 기타 사물에 대해서 오늘 방송에서는 생략함)
국공내전 막바지에 장졔스는 더 이상 후퇴할 여지가 없었고 타이완을 선택한 후에는 바로 고대 문헌, 문건, 서적, 고궁 유물들 외에도 황금을 타이완으로 실어날랐다.
중화민국 국고에 있는 황금을 타이완과 샤먼(푸젠성 샤먼福建省廈門)으로 옮겼던 시기는 1948년11월에서 1949년10월 사이 1년 간이었다. 황금을 운반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영국 기자에 의해 보도되면서 중국은행에서는 황금을 찾는 고객들로 아수라장을 방불케했다. 혹시 들어보셨을지 모르지만 1947년 난징 중앙정부가 2기 달러 국채를 발행했었는데, 중국국민당이 일부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한화로 약 1조6350억원 정도된다. ‘양안인민관계조례’ 63조에 따르면 1949년 이전에 중국대륙에서 발행한 국채는 국가통일 이전에는 처리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하지만 지금의 양안관계를 보면 타이베이는 양안통일을 추구하지 않고 있어 이 문제는 계속 미결로 남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만 보더라도 이럭저럭 미결, 현안 문제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태평륜이 침물하면서 중앙은행의 중요한 문건 천3백여 상자가 물에 가라앉아버려 도데체 황금과 은원 그리고 채권 등등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이 불가능하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후퇴하면서 가지고 온 황금은 112톤 내지 187톤으로 추산하고 있어서 보통 150톤 정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하여 약탈해 간 중화민국의 금.은과 외환 등을 황금으로 환산할 경우 황금 6천톤을 초과한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건 일본군과 전면전쟁에 나선 건 중국국민당이 인솔한 국군으로 정면 작전을 진행했고, 공산당은 함락된 지역에서 유격작전을 펼치며 공산당 세력을 키웠고 홍군은 130여만, 민병은 260여만 명으로 늘렸고, 공산세력 지역 인구는 약 1억에 달했다는 것이다.
1949년1월 태평륜이 상하이에서 타이완으로 향하던 중 조난사고를 당한 게 수수깨끼라고 말하는 걸 많이 듣는데, 불행한 사건임에는 틀림 없으나 특별히 신비로운 색채가 깔려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장졔스가 황금을 다 가져왔다는 얘기는 더 널리 퍼져있는데, 그게 그의 주머니에 들어간 건 절대 아니다. 당시 그 황금 모두 전쟁과 타이완의 경제와 인프라 건설에 사용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白兆美
원고. 보도: 백조미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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