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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래를 부르자!” 타이완의 밥 딜런 리솽저의 <메이리다오>

  • 2021.08.03
레트로 타이완
공공방송사에서 제작한 리솽저의 다큐멘터리「우리의 노래를 부르자 (唱自己的歌)」속 리솽저의 모습. 서서 기타를 연주하는 이가 리솽저다.[사진=공공방송사 유튜브 채널 캡처]

레트로타이완시간입니다.

1970년대와 80년대 타이완 청춘 문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캠퍼스 포크송 ‘교원민가(校園民歌, 일종의 캠퍼스 포크송)’는 미국 포크록 가수 밥 딜런의 음악 감성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작곡가이자 가수인 리솽저(李雙澤)는 타이완 대중음악사에서 밥 딜런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아티스트로 회자되곤 합니다. 그의 음악을 접한 이들은 모두 입을 모아 하나 같이 말하죠. ‘타이완의 밥 딜런’이다라고요.

 

我們搖籃的美麗島 是母親溫暖的懷抱

우리의 요람 포모사(메이리다오)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 안,

驕傲的祖先們正視著 正視著我們的腳步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직시하네 우리의 발걸음을.

他們一再重覆地叮嚀 不要忘記不要忘記

그들이 거듭 부탁하네. 잊지 말라고, 잊지 말라고.

他們一再重覆地叮嚀 蓽路藍縷以啟山林

그들이 거듭 부탁하네, 누더기 옷을 입고 수레 끌며 산림을 일궈야된다.

婆娑無邊的太平洋 懷抱著自由的土地

하늘 하늘 무한한 태평양이 품고 있는 자유의 땅,

溫暖的陽光照耀著 照耀著高山和原野

따스한 햇살이 높은 산과 들판을 비추고 또 비추네.

我們這裡有勇敢的人民 蓽路藍縷以啟山林

우리 여기 용감한 시민들, 누더기 옷을 입고 거친 수레를 끌며 산과 들판을 개척해 어떤 난관에도 나라를 지키리.

我們這裡有無窮的生命 水牛 稻米 香蕉 玉蘭花

우리 이곳의 있는 무한한 생명, 물소, 쌀, 바나나, 목련화.

 

어떤 난관에도 나라를 지키라는 선조들의 당부의 말. 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가사는 음유시인 리솽저가 작곡하고 그의 절친이자 여자 가수 양주쥔(楊祖珺)이 부른 <메이리다오>입니다. 아름다운 섬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포모사에서 유래한 리솽저의 대표곡<메이리다오>는 197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없던 애국심도 활활 타오르게하는 리솽저의 <메이리다오>는 한때 타이완에서는 들을 수 없는 금지곡이었습니다.

도데체 왜? 과연 어떤 이유로 1970년대 대학 캠퍼스를 뜨겁게 달궜던 리솽저의 <메이리다오>가 당시에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오늘 레트로타이완시간에서 속 시원하게 그 뒷이야기를 나누어볼까합니다. 그럼 음유시인 리솽저가 대학 캠퍼스를 주름잡던 1970년대 타이완으로 저와 함께 레트로여행을 떠나볼까요?

1960~70년대 전 세계는 서양 음악에 열광했습니다. 이 시기 서양 팝을 번안한 곡들은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메마랐던 감성을 촉촉히 적셔줍니다. 대표적인 예로 윤형주와 송창식은 '트윈폴리오' 시절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바람 속에'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 타이완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팝송을 따라 불렀고, 어딜가나 서양 팝송이 흘러나왔죠. 어떻게 보면 1960~70년대 타이완 대중음악은 서양 팝송에 잠식당해 자생적 문화에 대한 발전이 거의 침체된 상태였습니다. 또한 음악 창작 활동에 있어서도 대중에 입맛에 맞춘 돈이 되는 서양의 팝을 번안해 부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76년 12월 3일 타이완 단장대학교에서 열린 서양민요무대(西洋民謠演唱會)의 그가 해성처럼 등장합니다. 다부진 체격의 리솽저는 한 손엔 기타, 그리고 한 손엔 서양 문화의 상징인 코카콜라를 들고 무대에 섰습니다. 이어 그는 “꼭 미국산 팝송이어야합니까? 왜 여러분은 우리의 노래는 부르지 않죠?”라는 물음을 관객에게 던지고, 타이완의 본토민요 <헝춘조恆春調> 등을 목청껏 불렀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관객들의 야유가 터져나왔습니다. 쿨한 남자 리솽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양 팝송을 들어야겠어?”라는 말을 객석에 던진 뒤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완창하고는 바람처럼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서양 팝 음악에 빠져 있는 동문들에게 리솽저가 일침을 날린 이 사건으로 단장대학교는 발칵뒤집혔습니다. 단장대학교 교내지 《단장주간》에는 몇 달 간 이 사건을 주제로 썰전이 벌어졌죠. 이를 계기로 리솽저는 “우리의 노래를 부르자唱自己的歌”라는 신념으로 직접 작사,작곡 등 음악 창작에 몰두합니다. 그러다 1977년 9월 10일 리솽저는 물에 빠진 외국인을 구하다 약관 28살에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떠난 뒤 타이완의 지식인들 특히 학생들은 더 이상 서양 팝송이 아닌 ‘우리의 노래를 하자”며 직접 작곡 작사하고 기타로 반주하는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하죠.

리솽저의 음악세계는 1970~80년대 뤄다요우, 리종성 등 가수들이 ‘우리의 노래를 하자’며 만다린어와 민남어 등 타이완 본토 언어를 담은 노래를 부르는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가 떠나고 2년 뒤인 1979년 가수 양주쥔은 친구가 남긴 <메이리다오>를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한 동명앨범에 수록해 발표하게 됩니다. 그런데 같은해 뜬금없이 민주화 세력이 자신들이 발간하는 진보잡지의 이름을 <메이리다오>로 채택하게 되면서 일이 묘하게 흘러가게됩니다. 설상가상 <메이리다오> 잡지 관계자들이 그 해 12월10일 남부 가오슝(高雄)에서 주도한 반정부 시위 일명 메이리다오 사건 혹은 타이완판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반란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이때 실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이후 민주진보당 창당과 타이완 민주화의 초석이 됩니다. 우선 <메이리다오> 사건의 변호를 맡던 천수이볜은 최초의 진보 정당 출신 총통이 되고, 부총통은 당시 잡지 <메이리다오> 부사장인 뤼수옌이 당선되죠.

잡지사 <메이리다오>와 이들이 주도한 메이리다오 사건이 권위주의 체제에 항거하는 자유의 상징으로 발전하면서, 일이 이렇게 꼬이다보니 정작 노래를 만들고 부른 리솽저와 그의 절친 여자 가수 양주쥔은 <메이리다오>가 운동권가요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저 이름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정권이 금지곡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우리의 노래를 부르자’라는 신념에서 만든 <메이리다오>는 오히려 1970~80년대 운동권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 되버리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끝에 1987년 7월 장징궈 총통이 계엄을 해제한다 선포하면서 비운의 노래 <메이리다오>는 빗장을 풀고 세상 밖으로 나와 마침내 대중의 품으로 돌아오게됩니다.

지난 2016년 차이잉원 총통의 첫 취임식장에서는 한때는 금지됐던 노래 <메이리다오>가 울려퍼지기도 했는데요.

그때 그 시절 자유롭게 듣지 못했던 <메이리다오>를 마음껏 들어보시라고 오늘 엔딩곡으로 리솽저가 남긴 <메이리다오>를 제가 준비했습니다. 그럼 금지곡이었던 <메이리다오>를 띄어드리며 마치겠습니다. 이상으로 레트로타이완의 손전홍입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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