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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신문학의 아버지’ - 라이허

  • 2021.03.05
포르모사 문학관
타이완 일본 통치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타이완 신문학의 아버지(台灣新文學之父)’로 불리는 라이허(賴和) - 사진: 위키백과 제공

라이허는 타이완 일본 통치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타이완 신문학의 아버지(台灣新文學之父)’로 불립니다. 라이허의 본명은 라이허(賴河)인데요. 라이허는 1894년 타이완 중서부 장화(彰化)현에 태어났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의 패배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일본제국의 식민지 신민이 됐습니다. 14살부터 한문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고 문학 기초를 탄탄히 다졌으며, 1909년 타이베이에 있던 타이완 총독부 의학교, 현재의 타이완대학교 의학원을 졸업했고 8년 뒤 고향 장화현에서‘라이허병원’을 세웠습니다.

라이허는 현재 우리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달리 팔자수염을 기르고 항상 반팔옷과 반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료비를 깎아주거나 아예 안 받을 뿐만 아니라 비싼 약품까지 무료로 주기도 하며,  연말에 회계 장부를 모두 불태워 없애고 환자가 의료비를 갚고 싶어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받아주지 않은 라이허는 현지 사람에게 ‘장화마주(彰化媽祖)’라고 불렸습니다.

라이허는 1년여 동안 샤먼(厦門)의 한 병원에서 근무했을 때 중국 5·4 운동과 중국 백화문 운동에 자극을 받아서 타이완에 돌아온 후 타이완 신문학 운동을 추진하는 데 심혈을 많이 기울이며 일치시기 가장 중요한 문화계몽운동 조직으로 여겨진 타이완문화협회(台灣文化協會)에 가입해 항일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며, 백화문으로 다양한 성질의 문학 작품도 창작했습니다. 라이허가 사용했던 백화문은 중국 백화문, 즉 베이징말이 아닌 한어와 민남어를 융합하여 형성된 타이완 백화문인데요. 그는 이를 통해 전정한 타이완 문학를 탄생시키려고 했습니다.

라이허의 작품은 대부분 ‘옛 풍속의 패괴’, ‘모욕을 당한 인민’, ‘약자의 분투’ 등 주제를 다루며 항일 정신을 가득 담고 있는데요. 1925년 장화현 어린(二林)의 사탕수수 농민들이 일본 경찰과 제당회사의 장기적 압박에 불만해서 시위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던 ‘어린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라이허는 이 사건에 영감을 얻어 노동 착취를 당한 타이완 농민의 대한 연민과 일본 정부의 어질지 않은 행위에 대한 분노를 담아낸 시 ‘각오 하의 희생(覺悟下的犧牲)’을 발표했습니다.

각오는 보통 어떤 일을 꼭 실천해야 할 결심이고 희생은 큰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라이허는 시에서 ‘각오 하의 희생’을 계속 반복 언급하며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몇번 강조한 것을 보면 어린 사탕수수 농민들의 희생에 대한 라이허의 경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 지배자의 추악한 면모와 잔인한 본성은 또한 ‘약자의 애걸은 압박만 받는다, 약자의 노동은 조소만 받는다’ 라는 시구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저항 장신과 하계층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라이허의 작품은 동시대와 다음 시대의 신문학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장화현 출신 사람들로 구성된 밴드가 라이허의 시를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고 앨범을 냈는데 여기서 여자의 사랑에 대한 동경심과 전통의 속박에 갇히고 싶지 않는 마음을 담아낸 ‘그리워하는 노래(相思歌)’ 함께 듣겠습니다.

1923년 일본 정부는 정치적 집회와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치안경찰법’을 반포했는데 라이허와 기타 9명 사람이 이 법을 위반한 협의로 체포되어 3주 동안 수감됐습니다. 그러나 라이허는 이 때문에 항일 운동의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1926년 라이허는 타이완 일치시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타이완민보(台灣民報)’ 중의 ‘문예칼럼’의 편집장을 맡게 된 후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은 타이완의 현실 상황과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시, 소설, 산문 등 문학 작품을 발표하며, 동시에 후 세대의 젊은 작가들에게 지도와 조력을 주기도 해서 ‘타이완 문예계의 개간자(台灣文藝園地的開墾者)'‘타이완 신문학의 보모(台灣新文學的保母)’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941년 진주만사건이 발생한 날에 라이허가 아무 이유 없이 재수되다가 50일 후 석방됐는데 라이허는 이로 인해 신체적과 심리적인 충격을 많이 받아서 2년 후인 194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이허는 생전 타이완 의학계와 문학계에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 계몽 정신, 저항 의식, 반식민주의, 인문정신 등 요소를 담은 라이허의 문학 작품을 보면 라이허의 타이완에 대한 깊은 사랑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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