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는 타이완에서 가장 발전하고 번영한 도시입니다. 타이베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타이베이 101, 중정기념당, 국부기념관, 타이베이 돔 등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죠. 한편, 골목길이나 작은 상점 등 타이베이에서 일명 ‘소소한 여행’을 하다보면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특정 시기의 개발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고, 등산이나 사이클링 등을 하며 타이베이의 산과 하천을 경험하다보면 이곳만이 선사할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도시 발전 과정 속에서 수많은 디테일과 풍성한 이야기를 남긴 ‘살아있는 도시’ 타이베이.
오늘 어반스케처스타이베이 시간에서는 지난주에 이어 타이베이 곳곳에 숨어있는 지명 속에 담긴 과거의 흔적들에 대한 이야기 들려드리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시대와 기회의 산물로 탄생한 타이베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타이베이는 “시대적 우연과 산업의 집적이라는 조건 덕분에 자연스레 타이완 전역에서 최고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요.
청말인 1860년, 서구열강의 침입과 성문을 부수는 대포 소리 속에 타이베이의 북쪽 항구, 단수이(淡水)가 개항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국 상사들이 진출했고, 북부 타이완의 풍요로운 자원 환경은 곧바로 세계화된 자본주의 개발의 지도 속에 강제로 편입되었습니다. 19세기 말, 타이완 수출 경제를 지탱하던 두 개의 거대 산업인 장뇌(樟腦)와 차(茶)는 모두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거래되었습니다.
광서(光緒) 시대부터 정권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바뀌면서 식민 지배가 시작된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연간에 이르기까지, 타이베이의 서쪽, 다다오청(大稻埕)은 타이완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차 거래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외국 상사와 부유한 차 상인의 대저택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그 경제적 생산력은 쌀과 설탕 산업 중심인 중남부 평야 지역을 훨씬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타이베이의 부상은 전략적 위치와 교통의 용이함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1880년대 청나라-프랑스 전쟁의 긴장 속에서, 북부 타이완의 전략적 가치는 마침내 소극적으로 타이완을 다스리던 청나라 중앙정부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당시 조정 내 당파 싸움이 끝나고,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해양세력 견제를 주장한 리홍장(李鴻章) 등이 러시아 북방 견제를 주장한 새방(塞防)파를 누르자, 조정의 자원이 타이베이 부성(府城) 건설과 북해안 방어 예산에 쏟아지게 된 것이죠.
타이베이 북부에 위치한 단수이와 지룽 두 항구를 연결하고, 타이베이 분지의 넓은 배후지를 가지고 있으며, 타이베이 서쪽 단수이 강변에 위치한 멍자(艋舺)와 다다오청(大稻埕)이라는 두 대형 무역 항구를 쥐고 있던 타이베이 도시는, 그렇게 타이완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도시가 되었습니다.
군사 방어와 경제 생산이라는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타이베이는 타이난, 타이중 등 다른 부성(府城)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입니다.
일본이라는 새로운 식민 지배자는 북쪽에서 왔고, 그러면서 지룽(基隆)은 일본 본토와 동북아를 잇는 주요 항구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타이베이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갔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 제도를 주창하는 일본 식민 정부는 근대적인 통치 수단을 통해 타이베이에 현대식 우편, 병원, 법원, 대학, 박물관, 공회당, 전매국 등을 도입하여 타이베이를 타이완 전체에서 으뜸이 되는 행정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위의 신사인 ‘타이완신사(臺灣神社)’도 바로 타이베이에 세웠죠. 이로써 타이베이는 이후 100년 넘게 타이완 최고의 도시 자리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타이완은 연합군에 의해 중화민국의 통치하에 놓였고, 4년 만에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철수하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 계층과 타이완 민중이 같은 섬에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정부 통치 초기에는 ‘반공(反共)’에만 몰두하느라 타이완을 제대로 운영할 생각이 없었던지라, 일본 식민 시기의 타이베이 중심 체제를 거의 고민 없이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1970년대, 장제스(蔣介石)의 사망과 함께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정권을 이어받으며 타이완 전역에 걸친 인프라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전자 제품 위주의 미래 산업이 타이완의 산업 방향으로 확정되었죠.
이후 타이완은 1980년대에 들어 말그대로 ‘경제 기적’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산업과 상업의 전략 본부는 여전히 타이베이에 머물렀습니다.
산업별, 지역별로 보는 타이베이 산업 업그레이드의 역사
문화 산업 대부분도 타이베이에 집중되었습니다. 타이완 영화 산업의 중심지는 전후부터 줄곧 극장이 밀집한 시먼딩(西門町)이었고, 지금도 주요 영화 회사들은 대부분 시먼딩에 모여 있습니다. 반면, 1960년대부터 세 개의 주요 방송국인 TTV (Taiwan Television, 台視), CTV (China Television, 中視), CTS (Chinese Television System, 華視)가 잇따라 개국하면서, 당시 점차 개발되던 타이베이 동쪽(東區, 이하 동취)으로 방송국들이 몰려들었고, 이후에는 텔레비전 산업의 하위 산업들인 스튜디오, 영상 제작사, 커뮤니케이션 회사, 모델 에이전시, 음반사 등도 모두 동취(東區)에 집중되었다. ‘영상 산업은 서쪽, TV 산업은 동쪽’ 이라는 흥미로운 구도가 형성된 것입니다.
금융 산업은 과거 타이베이 구시가지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동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현재 난징둥루(南京東路)는 금융 오피스 빌딩이 밀집한 지역이 되었고, 여행사는 송장난징로(松江南京路) 교차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업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과거에는 공장이 밀집해 일명 ‘타이베이의 흑색 지대’로 불리던 난강(南港) 지역이 지금은 첨단 산업 중심지로 탈바꿈하고 있죠. 난강전람관(南港展覽館)에서 난강소프트웨어단지(南港軟體園區)까지, 타이완 산업의 미래 중심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군이 타이완을 방어하게 되면서,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는 주둔 미군 고문단과 숙소가 대거 들어서기도 했는데요. 이에 따라 한국의 이태원이나 평택 인근 처럼 타이베이 북부를 중심으로 중산베이루(中山北路), 톈무(天母), 양밍산(陽明山) 일대에는 미군 시대의 특수 산업이 형성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톈무의 아메리칸 레스토랑, 수출용 의류, 빈티지 패션 산업 등이 그 흔적입니다.
1970년대 일본의 경제 기적 이후 일본인들의 타이완 출장과 관광이 유행하면서, 중산베이루(中山北路)는 호텔이 즐비한 거리로, 린선베이루(林森北路) 사이사이의 ‘티야오퉁(條通)’ 골목은 일본 관광객을 위한 이자카야, 야끼니꾸집, 스낵바(スナック) 등, 일본식 유흥 거리가 되었습니다. 신베이터우(新北投)의 온천 지역은 일본인들의 인기 명소가 되었고, 그에 따라 형성된 온천 관광·오락 산업은 북투의 나가시(那卡西) 문화, 요정 음식 문화 등과 함께 타이베이의 무형문화유산이 되었고요.
학생을 대상으로 한 유행 산업—패션, 교복 맞춤, 음반점 등은 대학 밀집 지역이자 학생들의 버스 환승 중심지인 공관(公館)에 형성되었습니다. 공관과 스다(師大, 타이완사범대) 지역은 대학생이 많이 모여 있어 독립 서점, 중고 서점, 인문학 카페 등이 밀집하게 되어있지요.
그러나 이후 동취와 신이(信義) 개발 계획 구역이 본격화되면서, 현재 타이베이의 유행과 오락의 중심지는 신이구(信義區)로 완전히 옮겨진 상태입니다. 국제 명품 브랜드, 영화관, 레스토랑, 고급 호텔, 기업 본사 등이 대부분 신이구에 들어섰고, 신이구는 타이베이의 야경과 밤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말의 신이구는 말 그대로 ‘잠들지 않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
이렇듯, 타이베이는 청나리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외부인을 흡수해 온 ‘이주민들의 도시’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학업이나 취업을 위해 외지에서 타이베이로 이주해오고 있고, 또 많은 이들은 부모 세대가 타이베이에 정착한 후 이곳에서 태어난 ‘타이베이 2세대’이기도 합니다. 이 두 부류가 타이베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3대 이상 타이베이에 뿌리를 내린 가문은 드물다는 말이겠죠.
산업 발전의 중심지이자, 정치 중심지이기도 한 타이베이에는 공무원, 교수, 교사, 상인, 고위 관리자, 외국계 기업 종사자, 스타트업 인력이 타이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습니다.
그 결과, 타이베이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타이완 사람들에 비해 대체로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다소 거리감을 유지하는 인상을 주곤 하죠. 말은 점잖고 적절하지만 속마음을 알기 어렵고, 설령 악의나 비하가 있어도 단어로 포장해 표현하기 때문에, 외지인에게는 타이베이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빠른 도시 리듬, 과밀 인구가 뒤섞인 도심 공간 속에서 타이베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아주 가까운 물리적 거리에서 살아가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타이베이 사람들은 타인과의 거리 감각에 더욱 신중하고, 상대방의 공간을 존중하며, 자신의 공간이 침범당할 경우 민감하고 방어적이기도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타이베이는 항상 외부인을 포용하는 도시였고, 넓은 마음과 개방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언젠가 타이베이가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도시가 된다면, 그날이 바로 이 도시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Rti 중앙방송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