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 우미차(吳密察) 역사학자의 <타이완사란 무엇인가?> 중 가장 마지막 장, 16장 ‘일본시대에 발아한 타이완 민족주의는 왜 실패했을까?’의 본문을 소개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하 글은 번역문입니다.)
*'臺灣'은 맥락에 따라 '대만' 혹은 '타이완'으로 번역합니다.
*'臺灣人‘ ’臺灣籍民‘ 등 일제 시기 기록에 남아 있던 용어의 경우 '대만'으로 표기했고, 그 외에는 '타이완'으로 표기합니다.
롄야탕(連雅堂)의 타이완 문화론
1895년의 할양과 ‘번자 반란(走番仔反)’은 대만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특히 타이완의 식자층 일부는 이러한 의분과 좌절을 글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타이완의 식자층이 타이완의 처지를 처음 기록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롄야탕(連雅堂)’이다. 그는 18세 때 대만 할양이라는 큰 변화를 맞았고, 그의 입신양명에 대한 꿈은 산산조각 났다.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신문사에 편집자로 몸을 맡기면서 한편으로는 기회를 찾아 중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1918년에 《대만통사(臺灣通史)》를 출판한 이후 《대만시승(臺灣詩乘)》, 《대만어전(臺灣語典)》을 잇달아 저술했다. 이 세 저작은 각각 타이완의 역사, 문학, 언어를 정리한 것으로, ‘타이완 민족주의’의 싹이 트는 시기의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롄야탕은 ‘대만/타이완’을 단위로 삼아 역사, 문학, 언어를 정리하여 타이완이 문화적 내용을 갖추도록 하였고, 이는 타이완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고취시켰다. 이런 이유로 그는 20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타이완 문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엮어낸 타이완 문화에는 약점도 있다. 그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 방식(문자와 문체 포함)을 사용했으며, 타이완의 문화 정신을 혈통주의에 기반한 ‘한족(漢族)’ 의식 위에 세웠다. 이것은 그가 결국 타이완을 떠나 중국으로 가게 되는 결말을 예고하기도 했다.
동아시아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20세기 초 중국의 량치차오(梁啟超)는 역사학 혁신을 통해 근대 민족사학을 수립했고, 한국의 신채호는 중국으로 망명해 한국어로 한국의 국가사학을 세우려 했다. 반면 롄야탕은 여전히 중국의 구(舊) 사학 틀 안에 머물러 있었고, 게다가 일본 총독부, 대만문화협회, 중국 정부 등 여러 정치 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이런 점에서 롄야탕이 ‘민족 문화’를 찾아냈다 해도, 그가 말하는 문화는 ‘류큐학의 아버지’ 이하 후유(伊波普猷)와 유사하다. 두 사람이 제안한 민족 문화는 결국 혈통주의 ‘동조론(同祖論)’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하는 류큐 민족과 일본 민족이 같은 혈통이라 보고, 롄야탕은 타이완과 중국이 모두 ‘한족’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롄야탕의 노력에는 이러한 약점들이 있으나,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와 같은 민족주의적 문화 시도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 사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치 50년 동안 ‘타이완의 역사가’로 불릴 만한 현지인은, 아마 롄야탕 한 명과 양윈핑(楊雲萍)뿐일 것이다. 그래서 타이완 문화의 해석은 오히려 일본 식민 정부(그들이 설계한 교육 포함)에 의해 주도되었고, 《민속대만(民俗臺灣)》 같은 식민주의 색채를 지닌 간행물들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식민자가 정의한 ‘타이완의 특색(臺灣性)’
롄야탕과 같은 본토인의 타이완 문화론과는 달리, 식민자들은 자신들과의 비교를 통해 오히려 명확하게 ‘타이완의 특색’을 규정하였다.
이들은 ‘풍토론(風土論)’을 기반으로 삼았다. 즉,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자연 풍토에 따라 서로 다른 생활과 문화를 형성한다는 전제를 둔 것이다. 이 관점 아래, 식민자들은 대만의 다양한 ‘특색’을 발견하고 정의했다.
잘 알려졌듯, 타이완에서 서양화가 등장한 것은 이시카와 긴이치로(石川欽一郎)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타이베이 중학교, 총독부 국어학교, 사범학교 등에서 가르친 식민지 교육자였으며, 타이완인들에게 산수와 풍경을 실사(寫生) 방식으로 그릴 것을 가르쳤다. 그는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대만의 따뜻한 기후, 풍부하고 선명한 색감을 ‘지역 특색’으로 강조하였다.
일본인의 타자(他者)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원주민은 대만의 특징이고, ‘열대’는 대만의 특징이다(일본은 ‘온대’ 또는 ‘냉대’로 분류됨). 색채가 다채로운 누각 건축은 타이완의 특징이며(일본 사찰은 거의 색을 칠하지 않음), 물소는 타이완의 특징이다(일본에는 말은 있어도 소는 없다). 야자수는 타이완의 특징이다(일본에는 야자수가 없다). 타이완의 파인애플, 바나나, 사탕수수도 당시 ‘특산물’로 규정되었다.
니시카와 만(西川滿), 다테이시 테츠오미(立石鐵臣)와 같은 타이완 주재 일본인 문학가, 화가, 또는 일본인과 대만인이 함께 만든 《민속대만(民俗臺灣)》 등은 우리에게 ‘타이완’을 발견하고 정의해 주었다. 식민자의 타자의 시각에서 발견되고 정의된 ‘타이완’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일본인에게 널리 퍼졌을 뿐 아니라, 타이완인들 또한 이를 수용하고 내면화하며 반복적으로 재생산했다. 이는 점차 자신들의 정체성 표식이 되었다.
예를 들어, 타이베이 제국대학(현 국립대만대학교)은 일본인들에게 ‘제국의 남쪽 열대지방에 세운 대학’으로 여겨졌기에, 남양의 야자수가 심어진 대로(椰林大道)를 특별히 설계하였다. 이 야자수 길은 오늘날 대만대학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식민자가 발견하고 정의한 ‘타이완의 특색’은 거의 모두가 오늘날 타이완의 문화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식민자들은 오히려 대만의 ‘민족주의’ 형성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장웨이수이(蔣渭水)의 정치론
식민 정부 당국에 대한 항의로, 타이완에서는 1920년대 이후 다음과 같은 정치 활동이 나타났다. ‘대만문화협회’, ‘대만 의회 설치 청원 운동’, ‘대만민중당’, 그리고 ‘지방자치연맹’ 등.
그중 ‘대만문화협회’는 처음에는 문화 계몽 단체의 형태로 등장하였다. 목적은 타이완에서 근대 서양의 이성, 과학, 개인주의, 법치 등의 관념을 선전하는 것이었기에, 일본 식민자들도 초기에 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단체가 점차 정치적인 의제에 접근하자, 일본 식민 정부는 이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만문화협회’는 점차 노동 계층 운동을 고취하는 단체로 발전해 갔다.
‘대만 의회 설치 청원 운동’은 청원의 형식을 통해 매년 일본 제국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며 타이완에 식민지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한 운동이었다.
일본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이와 유사한 청원 운동이 존재했지만, 해방 후 한국의 역사학계는 이 운동을 ‘친일 운동’으로 보았다. 이는 이런 제국 의회를 향한 청원 운동이 그 이론적 근거나 행동 방식 모두 매우 온건하고 점잖으며, 기본적으로 일본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일본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진행된 합법적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법 투쟁의 청원 대상은 일본의 행정 당국이 아니라 일본 제국 의회였다.
이와 비교하면, 장웨이수이를 주요 지도자로 한 ‘대만민중당’은 상대적으로 더 급진적인 단체였다. 민중당은 일본 식민 정부가 인정한 정치 결사체로서, 정치적 선전이나 정치적 주장을 발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만에는 선거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설령 정치 결사체라 해도 민의(民意)의 대표가 될 수 없었고,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도 없었다.민중당의 정치적 주장은 타이완의 자치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당시 대만 사회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참고로, 「대만공산당」도 타이완 독립을 주장했지만, 이는 불법적인 지하 조직으로 공개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 세계 식민지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이와 같은 자치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영국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자치를 허용한 바 있다. 일본의 식민지학자들, 예컨대 교토대학의 야마모토 비에쓰(山本美越乃), 메이지대학의 이즈미 사토시(泉哲), 도쿄대학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등도 식민지 통치에는 자치주의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대만공산당’은 1928년 상하이에서 결성되었으며, ‘타이완 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민족’ 개념과 독립의 주장은, 분명히 당시 국제 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세계적 강령에 따른 것으로, 타이완 현지 사회의 실질적인 기반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이 조직은 불법 조직일 뿐 아니라 국외(상하이)에서 결성되었고, 구성원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실질적인 영향력은 매우 미미했다.
1930년대에 린셴탕(林獻堂), 양자오자(楊肇嘉)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지방자치연맹’은 ‘민중당’ 보다 더욱 후퇴한 조직이었다. 이 단체는 ‘지방자치’라는 단일한 목표만을 요구하며, 타이완 전체의 정치 체제를 개혁하려는 요구는 포기하였다. 결국 이 단체는 타이완 내부의 지방 정부 수준의 자치만을 요구했기에, 타이완 민족주의적 의미를 갖는 단체라 보기는 어렵다.
파시스트 의해 삼켜진 타이완 ‘민족주의’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비록 대만에 드디어 ‘타이완인’ 의식이 나타나고, 타이완 민족주의의 싹이 트기 시작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이 ‘타이완인’ 의식은 아직도 매우 미숙한 수준이며, 결국 일본의 식민 통치라는 기반 위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된 일종의 대항적 집단 의식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민족주의의 형성에는 종종 대항할 수 있는 ‘타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집단 내부에서 그 정체성을 뒷받침할 만한 질적인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다면, 이러한 민족주의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당시 대만인의 집단 정체성은 내부적인 질적인 내용 면에서, 혈통주의에 기반한 ‘한족’ 개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조국’으로 상정했던 중국은 당시 내부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국력도 매우 약했으며, 심지어 ‘한족’의 문화적 내용조차도 서구 근대의 다양한 가치관에 의해 도전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족’을 기반으로 네이션(nation)을 형성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반면, 타이완 총독부로 대표되는 ‘국가(state)’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앞서 언급한 1920년대의 이른바 ‘항일운동’조차도 사실은 일본 식민 정부의 정당성을 일정 부분 인정한 것이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식민 정부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뤄지는 사회 교화 운동과 ‘부락 진흥 운동’(‘부락’은 일본식 표현으로 단순히 마을을 의미하며, 특정한 원주민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님)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만에서 ‘국가의 시민’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 운동은 정부 주도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국어 강습회’나 ‘청년단’ 등의 조직을 만들고 교화를 실현하는 동시에, 경제적 측면의 개발도 강조하였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필요로 인해, 식민 정부는 더욱 효율성과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전쟁 동원력을 강화하였다. 결국, 일본의 국가주의 정부는 이제 막 싹트기 시작했지만 아직 뿌리 내리기 전인 ‘타이완 민족주의’를 집어삼켜 버렸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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