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로는 ‘크라테바 렐리지오사(Crateva religiosa)’, 영어로는 ‘템플 플랜트(temple plant, 사원 식물)’로 불리는 이 나무는 이름 만큼이나 상당히 신성한 기운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나무는 인도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신성한 식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요. 힌두교와 불교 사원 근처에 자주 심기 때문에 ‘종교(religiosa)‘ ‘사원(temple)’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신성한 마늘배(sacred garlic pear)’이라고도 불립니다. 열매의 모양이 마치 배(pear)처럼 생겼고, 일부 품종에서는 약간 매운 향이나 맛, 혹은 껍질의 질감이 마늘(garlic)을 연상시킨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의 외형 및 감각적 특징에서 나온 표현으로 ‘신성한 마늘 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월 중순이면 화려하고 긴 수술을 가진 꽃들이 타이베이 다안구(大安區)의 원저우 공원(溫州公園)을 환하게 수놓습니다. 궂은 비가 쏟아져 꽃들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한 달 내내 이 나무위에 핀 하얀 꽃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원저우 공원을 50년 째 지키고 있는 크라테바 렐리지오사 나무
국립타이완대학 캠퍼스 옆 신성난루(新生南路)와 이어진 원저우루(溫州路)에는 돌 미끄럼틀로 유명한 원저우 공원이 있습니다. 대학가인지라 과거에는 이 작은 골목길 사이에 10곳이 넘는 독립 서점이 영업했을 정도였다지요. 지하철 그린 라인 타이완전력공사역(臺電大樓站)을 나와 원저우 공원으로 향하는 길의 한 모퉁이에는 곧게 뻗은 크라테바 렐리지오사 나무가 우리를 반깁니다. 나무를 실물로 보면 영엄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키도 큰 데다가 풍성한 나뭇가지와 만발한 꽃이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특히 봄이 한창인 요즘, 4~5월에 가면 말이죠.
이 나무는 50년 넘게 조용히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나무가 지금 이 자리를 지키게 된 것은 ‘착오’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가 자라고 있는 땅은 원래 타이완전력공사(臺電)의 공사 부서 사무 공간이었습니다. 1970년대, 타이완전력 직원이 이 나무를 보리수나무(菩提樹)로 착각한채 심었고, 15년이 지나 꽃이 피고 나서야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이후 근처를 지나던 타이완대학교의 한 학생이 떨어진 나무의 꽃을 가져가 연구한 결과, 사람들이 보리수라 생각했던 이 나무가 사실은 오세아니아 원산의 ‘크라테바 렐리지오사’였던 것입니다.
거의 반세기를 산 이 나무는 4월 초 청명절 무렵이 되면 첫 꽃인 노란 꽃을 피운 뒤 시간이 지날수록 흰색, 연보라색으로 색을 바꾸며 만개합니다. 나비 날개 같은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면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장관을 연출하지요. 다섯 층 건물 높이의 거대한 수관은 그 자체로 시선을 압도하며, 많은 방문객들이 이 나무를 보기 위해 찾아옵니다.
예전에는 이 나무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2016년 타이완전력공사가 추진한 공공예술공간 개선 계획으로 담장이 철거되고 주변 전력 설비도 이전되면서, 이 나무는 자연스럽게 지역 주민들과 타이완전력공사의 공동 기억이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예술가들은 주변에 공공 예술 작품을 설치했고, 인근 독립 서점들도 나무 옆 벽에 자신들의 철학을 시와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50년 넘는 시간 동안 원저우공원을 지킨 이 나무처럼 타이베이시에는 50년, 무려 100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는 고목들이 있습니다. 도시를 녹음 있는 풍경으로 만들어줄 뿐 아니라 타이베이시의 현재와 과거를 함께 품고 있는 고목을 보면 마음이 경건해지기까지 합니다. 타이베이시에 살면서도 바쁜 일상으로 알지 못하고 지나쳤던 도심 속 고목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신성한 나무라고 불리는 '크라테바 렐리지오사' 나무는 4월 청명절 무렵 꽃을 피우기 시작해 5월까지 볼 수 있다.
즈산옌, 300년된 녹나무와 250년된 무환자나무
먼저, 타이베이 북쪽, 양밍산 기슭의 즈산옌(芝山岩) 근처에는 많은 고목이 있습니다. 즈청로(至誠路) 1단의 즈산공원(芝山公園)에는 수려하고 고풍스러운 외형의 고목이 한 그루 있습니다. 중국어로는 ‘장수(樟樹)’, 한국어로는 ‘녹나무’라고 알려진 나무입니다. 타이베이시 문화국의 조사에 따르면 이 녹나무의 나이는 무려 300살 이상으로,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녹나무일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즈청로 1단 즈산옌에 있는 국가 3급 고적으로, 청나라 건륭 17년(1752년)에 세워진 회제궁(惠濟宮) 사당의 마당 오른쪽 입구에는 250년이 넘게 이 자리를 꼿꼿히 지키고 있는 ‘무환자나무(無患子)’ 한 그루가 있습니다. 낙엽성 교목인 무환자나무의 잎파리는 평소엔 연둣빛이지만 가을이 되면 단풍처럼 노랗게 변해 특별한 풍경을 선사합니다. 무환자나무에 달려있는 동글동글한 열매가 참 귀여운데요. 이 열매에는 천연 계면활성제인 사포닌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예로부터 비누나 세제 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베이터우를 노랗게 물들이는 풍향나무
이번엔 즈산옌보다 북쪽에 있는 베이터우(北投)로 갑니다. 베이터우는 유명한 온천 마을이죠. 일본 식민 통치 시기, 온천을 즐기던 일본인들이 베이터우 지역을 온천지로 개발했는데, 단풍이 가을에 노랗게 물드는 특징 덕분에 ‘풍향나무(楓香樹, sweet gum tree)’가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베이터우 지역에 대거 심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베이터우 온천 지역은 일본식 정취가 가득한 마을이 되었는데요. 지하철 레드라인 신베이터우역과 멀지 않은 취안위안리(泉源里) 등산로에는 100년이 넘은 큰 풍향나무 세 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송산초등학교를 지키는 에리트리나 나무
타이베이의 네이후(內湖)와 송산(松山) 지역을 흐르는 지룽허(基隆河) 연안은 과거 카이다겔란족(凱達格蘭) 원주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붉은 꽃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에리트리나 나무(刺桐)’는 카이다겔란족이 신성하게 여긴 나무이죠. 송산구 바더루(八德路) 4단에 위치한 송산초등학교(松山國小)는 1898년 개교했고, 카이다겔란족 마을 유적지 위에 세워졌는데, 학교 안에는 100년 이상 된 고목이 3그루 있습니다.
그중 학교 서쪽에 있는 수령 약 120년의 나무는 학교 측 투표를 통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물건을 칭하는 ‘동령(銅鈴)’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나머지 두 그루에는 각각 ‘불로선(不老仙)’, ‘만수옹(萬壽翁)’이라는 이름을 얻어 백년 역사를 가진 학교의 명맥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난강 한 고택의 개오동나무
마지막으로, 난강구(南港區)에 소재한 선남궁(善南宮)은 ‘개오동나무’ 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사당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이 타이완을 폭격할 당시, 난강 공습 중 오늘날 수령 100년이 넘은 개오동나무 옆에 포탄이 떨어졌고, 나무 줄기가 포탄에 맞아 깨지면서 불상 모양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이 나무를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하네요.
타이베이에는 이처럼 수많은 고목들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타이베이의 역사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고목. 이 고목들은 한국에서는 없는 자생하지 않는 종들이 대부분이므로 타이완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다음에 이 명소들을 지날 기회가 있다면 발걸음을 멈추고 타이베이를 지키는 오래된 나무 친구들을 한 번 우두커니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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