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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법학의 메카 쉬저우로(徐州路) 캠퍼스의 전신,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 2025.02.25
대만주간신보
1919년 개교한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의 정문. 일본 식민 시기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부지는 국민정부 들어 국립타이완대학으로 합병되면서 해당 교사는 법학대학(法學院)으로 사용되었다.

국립타이완대학 법대 건물의 전신,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국립타이완대학 병원 근처, 타이베이 쉬저우로(徐州路)는 과거 타이완 법학의 메카였다. 국립타이완대학 법과대학이 바로 쉬저우로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중화민국 타이완을 이끌어온 정치, 경제, 법조계의 수장들이 대거 국립타이완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천수이볜(陳水扁), 마잉주(馬英九), 차이잉원(蔡英文) 전 총통이 모두 타이완대 법대 출신이다. 오죽하면 현 라이칭더(賴清德) 총통이 당선된 지난 대선이 타이완 직선제 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자 중 ‘타이완대 법대’ 출신이 한 명도 없는 선거라는 기사가 나왔을까. 이렇게 다수의 유수한 인재를 배출한 타이완대 법대 건물이 바로 쉬저우로에 있었다. 

그런데 쉬저우로 캠퍼스에 소재한 법대는 원래 일본 식민 시기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라고 불리던 일본인 전용 학교의 교사였다.(1926년부터는 타이완 학생도 입학 가능해짐)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는 타이완 총독부가 일본인의 고등 교육을 위해 설립한 고등 교육 기관 중 하나이다. 1922년에 완성된 교사 건물은 서양 고전 양식의 기둥과 아치 위로 일본의 검은 기와가 덮여 있다. 교사 근처에는 작은 연못과 정원도 있어 당시 타이완을 대표하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정부는 이 교사를 국립타이완대학의 일부로 합병시켰다. 일제 식민 시기 타이완 총독부가 세운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는 국민정부 들어 ‘타이완성 입법상학원’이 되면서 28년 간의 고등상업학교 역사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98년 타이베이시정부는 쉬저우 캠퍼스의 교사 건물을 유적지로 지정해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국립타이완대학 법과대학 건물의 전신인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다. 

타이완대 법대 출신의 기자 겸 작가 천로우진(陳柔縉)은 자신이 쉬저우 캠퍼스에서 법학 수업을 듣는 동안 이 장소가 일본 식민 시기 “같은 교실에서 북경 출신 교수가 북경어를 가르치고, 영국인이 영어를 가르쳤으며, 우리처럼 책을 안고 아치 아래를 지나가던 이들은 대부분 일본어를 쓰는 일본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라고 토로한다. 자신이 공부했던 ‘법학원(法學院)’ 교정이 실은 국립타이완대학의 전신인 타이베이 제국대학의 일부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실을 법학원에서 공부하던 1,000여 일 동안 전혀 알지못했으며, 아무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1919년, 타이완 총독부는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를 설립했으나, 처음에는 건물이 없어 총독부 내에서 임시로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현재 쉬저우루 일대는 당시 넓은 빈터였다. 1922년 3월, 고등상업학교의 ‘제1교동(第一教棟)’이 완공되면서 비로소 학교의 모습이 갖춰졌다.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연혁지에 따르면, 현재 유적지가 된 고등상업학교의 건물들은 단계적으로 완공되었다. ‘제2교동’은 ‘제1교동’에 이어 1922년 말에 완공되었고, ‘본관’은 1925년 3월 말에 준공되어 교실에 비해 2년 늦게 지어졌다.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의 제1교동과 제2교동 사이에는 야자수 가로수가 심어져있었다. 

중국어 원어민 교사의 '북경어' 수업

주로 일본인 학생을 대상으로 회계, 재정학, 법학 개론 등을 가르쳤던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에서 흥미롭게도 ‘북경어’ 수업을 개설했다고 한다. 북경어 교사는 왕더친(王德欽). 1921년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에서 북경어 강의를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태어난 만주족 출신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푸젠성에서 관직에 나가면서 푸젠어(漳州·泉州 방언)에도 능통했다고 알려져있다. 

왕더친은 22세에 타이완으로 건너와 타이중에서 북경어를 가르쳤으며, 이후 다다오청(大稻埕)의 한 회사의 소개로 타이베이로 올라와 한 가톨릭 성당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현재 이곳은 정수여중(靜修女中) 맞은편에 있는 타이베이 주교좌 성당 자리다. 신문에 따르면 그의 학생 중에는 일본인과 타이완인이 모두 있었고, 몇 달 만에 회화를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학생 중에는 타이완 전력회사 일본인 부사장 스미 겐센(角源泉)과 유명한 타이완 상인 쉬빙(許丙)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쉬빙의 추천으로 왕더친은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에 채용되었다.

쉬빙은 원래 타이완의 최고 부호였던 반차오 린가(板橋林家)에 고용되어 린슝정(林熊徵) 집안의 소작료 징수 및 재정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사교에 능하고 뛰어난 대인 관계 능력을 발휘해 결국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어 과거 자신의 주인과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 쉬빙과 그의 주인 린슝정은 타이완에서 가장 먼저 골프를 친 인물들이며, 단수이(淡水) 골프클럽의 첫 타이완인 회원이기도 했다. 쉬빙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자주 총독부를 방문해 골프 친구였던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郎)를 만났으며, 그 인연으로 조사과장인 가타야마 슈사부로(片山秀三郎)를 알게 되어 자주 교류했다고 한다. 가타야마는 이후 초대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쉬빙의 주인 린슝정은 화난은행(華南銀行)을 설립하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중국 상하이와 샤먼을 자주 오갔다. 쉬빙도 그를 따라다니며 언어의 소통이 교류의 시작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타이완 상인들은 한자를 읽고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관화(官話)인 표준 중국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쉬빙은 가타야마 교장에게 북경어 강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북경 관화 강좌(北京官話講座)’ 개설을 제안했다. 학교 측은 이를 수락하고 강사 추천을 요청했고, 쉬빙은 자신의 북경어 스승이었던 왕더친을 추천했던 것이다.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에서 강의하는 것 외에도, 왕더친은 화교 조직인 ’중화회관(中華會館)’과 자신의 집에서도 강좌를 열었다. 집에서의 강좌는 수강 인원에 제한이 없었으며, 한 강좌당 수강료는 30엔으로, 학생들이 나눠서 부담했다. 당시 30엔은 하급 공무원의 월급보다 많은 돈이다.

1930년대 초반, 타이완에서는 북경어(北京語) 학습 열풍이 불었고, 왕더친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1931년 만주국이 수립되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기회를 찾아 몰려들었으며, 산둥 사람뿐 아니라 타이완 사람들도 차를 팔거나 병원을 여는 등 만주로 진출했다. 타이베이 상공협회 회장 천칭보(陳清波)는 만주를 다녀온 후, 타이완의 차, 채소, 과일을 수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만주 진출을 강조하면서, 진출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북경어와 한문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1936년, 왕더친은 중국 동북 지역과 화북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타이완 사람들을 위해 3개월 만에 북경어 회화를 익힐 수 있는 사회·상업용 교재를 만들어 야간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일제시기 왕더친은 타이완 화교계의 중요한 인물로, 중화민국 건국 기념일인 쌍십절 축하 행사에서 축전을 낭독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중화민국의 첫 타이완 주재 총영사인 린샤오난(林紹楠)이 부임했을 때, 화교 사회는 열렬히 환영했고, 린샤오난이 부두에 도착해 악수한 세 명의 대표 중 한 명이 왕더친이었다. 

영국 원어민 출신의 영어 수업

북경어 외에도 일제시기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는 영어 교육의 중심지였다. 이 학교는 오랫동안 영국인 교수를 영어 담당으로 초빙했으며, 일본인 영어 강사였던 이시자키 세이지로(石崎政治郎)는 미국 캔자스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일본 정부가 초기에는 타이완 사람들의 아편 흡연을 점진적으로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해, 허가증을 가진 중독자에게만 아편을 판매했으나,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타이완에서 양귀비를 재배하고 비밀리에 아편을 흡연하는 무허가 중독자들에게도 합법적으로 아편을 판매할 계획을 추진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무려 2만 5천 명이 아편 흡연자로 등록을 신청하면서 중독자가 대폭 증가했다. 이에 장웨이수이(蔣渭水)는 장웨청(張月澄)과 함께 해결책을 논의하고, 즉시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긴급 전보를 보내 일본 식민 정부의 정책을 고발했다. 

국제연맹 대표단이 구원자처럼 타이베이에 도착했지만, 중국어나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해 영어로 작성된 설명서가 필요했다. 당시 영어에 능통한 타이완인이 많지 않아 장웨청이 초안을 작성한 후 신중을 기해 한 영국 친구에게 도움을 받아 교정을 보았다. 이 중요한 역할을 한 영국인이 바로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의 영어 교사였다.

1931년 1월 18일, 타이완 중등학교 최초로 열린 ‘영어 웅변 대회’에서도,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는 타이베이 고등학교, 타이베이제1중학교 등 타이완 인재들이 모인 다른 학교를 재치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해방 후 타이완 초기 경제의 주요 인물...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출신

해방 후, 국립타이완대학교 법학대학으로 건물의 용도가 바뀌면서 일제시기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의 역사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러나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출신의 타이완 학생들은 전후 초기 타이완 경제계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융펑(永豐)그룹의 초기 총경리였던 후즈핑(胡自瓶), 화난은행(華南銀行)의 총경리였던 가오탕판(高湯盤), 그리고 다퉁(大同)의 부총경리를 지낸 딩루이량(丁瑞鉠) 등…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는 학생들이 보다 넓은 세상에 눈을 뜰 수 있도록 경제, 회계, 그리고 외국어 교육에 나섰던 경제인 양성의 메카였다. 그래서 타이베이 고등상업학교 졸업생과 전후 초기 타이완 기업인 간의 관계에 대해 보다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참고로 쉬저우로에 위치해있던 국립타이완대학 법과대학은 국립타이완대학 본 캠퍼스인 공관(公館) 캠퍼스로 이전해 있다. 

►참고문헌 
陳柔縉 《舊日時光》 大塊文化 2012.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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