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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파오(長袍)에서 양복으로

  • 2024.12.10

창파오(長袍)와 변발 차림의 타이완 남성들

청나라와 중화민국 초기 시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남성복, 창파오(長袍). 어깨에서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옆구리에 단추가 있어 말을 타는 데 불편함이 없게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데요. 원래 만주족 전통의상인 창파오를 청나라 때 한족이 입기 시작하면서 보편화되었고, 중화민국 초기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창파오를 착용했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혼례와 같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고서는 창파오를 직접 보기는 어려워졌죠.   

그렇다면 타이완 남자들은 언제부터 창파오 대신 서양식 옷차림인 양복을 입기 시작했을까요?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서는 타이완 양복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양식 복장인 양복에 앞서, 창파오와 함께 청대 남성의 상징적인 헤어스타일, 변발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청대 타이완 남자 옷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는 하나의 두루마기로 된 창파오를, 농민이나 노동자와 같은 계층 남성들은 창파오 대신 상하의가 분리된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고 하죠. 그러나 변발은 당대 남성이라면 계층을 막론하고 모두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앞 머리카락은 밀어버리고 뒷 머리카락만 길게 늘여 땋은 변발은 17세기 중반 만주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한족에게 억지로 붙인 일종의 ‘승전 기념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대 초기 많은 명나라 충신들은 변발을 거부하며 항거하기도 했다죠. 

'중국인'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변발

하지만, 이백여 년이 지난 후, 세상 물정이 달라지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변발이 일상이 된 청말 남성들의 차림새가 점차 서구화되면서 변발을 자르려는 사람들이 증가했는데요. 전 베이징대학 총장인 장멍린(蔣夢麟, 1886-1964)이 청년 시절었던 1908년(광서 34년) 미국에 유학가기 전 변발을 자르려하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변발을 자르는데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것이죠.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에서도 변발을 자른 유학생이 귀국하자 그의 어머니는 여러 차례 울었고, 그의 부인은 우물에서 뛰어내렸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명나라 충신에게 외면 받던 변발이 청나라 말기에 이르자 곧 중국인의 민족 정체성이 되어버린 셈이죠. 

타이완 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타이완 중부 난터우 출신 작가 장선체(張深切, 1904-1965)는 자신이 아홉 살에 변발을 자르자 ‘가족 모두가 울었다. 조상의 신위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며, 그의 아버지는 마치 사람을 죽인 것처럼 망연자실하며 눈물을 흘렸다고도 전했습니다. 

1895년, 일본이 타이완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서구화 바람이 전 타이완 섬에 세차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일제시기가 되자 남성들이 자신의 복장을 양복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길게 땋은 변발을 싹둑 자르는 변신은 일찍이 시도하기 시작했죠. 타이완에 양복이 전해진 이야기를 하기 전 반드시 변발을 언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연에서 필연으로: 변발 자르기와 양복 입기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타이완에서 첫 번째로 변발을 자른 사람은 열다섯 살의 야오수이투(姚水土)입니다. 1895년 일본군 근위사단이 타이베이 북문성 아래로 진격했으나 성문이 깊이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두 사병이 사다리를 놓아 성벽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대나무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본 근위사단 단장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北白川宮能久) 친왕(1847~1895)은 부인에게 상을 주고는 그녀의 둘째 아들, 야오수이투를 데리고 갔습니다. <흥미로운 타이완사화>(興味の臺灣史話)에 따르면, 야오수이투는 변발을 자르고 양장을 차려입고는 친왕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고 설명합니다. 요시히사 친왕은 몇 개월 후 타이완에서 병사했지만, 친왕의 총애를 받았던 야오수이투는 후에도 또다시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 일찍이 한 상인에 의해 도쿄로 가 초대 타이완 총독인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1837-1922)의 집에 들어가 초등학교를 다니고 타이완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요. 

우연히 일본 고위직 인사를 접한 타이완 소년이 큰 충돌없이 양복을 입고 변발을 자르는 데 성공한 것이 이후 더 많은 타이완인들에게 무거운 역사의 흐름을 직면하게 하는 순간을 가져다 준 것이죠. 

양복의 선구자는 바로 타이완의 차 상인들

타이완을 점령한 일본의 지도자들은 결코 변발을 자르고 개조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죠. 그러나 오히려 일부 타이베이 상인들이 솔선하여 변발을 자르려는 생각을 갖고,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00여 년 전, 타이베이 다다오오청(大稻埕)의 유명 차 상인 리춘성(李春生, 1838년생)은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된 이듬해 2월, 가바야마 스케노리 총독과 함께 도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다. 리춘성이 쓴 <동유육십사일 수필(東遊六十四日隨筆)>에 따르면, 일본의 시골 아이들이 그의 청나라 옷차림을 보고는 ‘원수 같다’며 ‘창창보’라고 놀려댔다고 하죠. 그는 ‘가는 길 마다 무뢰배와 돌을 던지고 욕하는 고통을 겪는 바람에 (옷차림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3월 2일 저녁 여관 주인에게 외국 옷을 주문 제작할 장인을 초청해줄 것을 요청해 3일 안으로 준비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다’고 말합니다. 

5일 뒤인 3월 7일, 리춘성은 서둘러 여관으로 돌아가 주문한 양복을 입어보고는, 즉시 변발을 깎는 예를 거행했습니다. 그러면서 리춘성을 말합니다. ‘유럽 사람이 아닌데도 영준한 기개가 갑자기 드러나니, 이미 이전의 허약한 새우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고요. 그러나 지난 60년 간 입던 중국옷에서 갑자기 양복으로 갈아입으니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리춘성은 이 날 저녁 응대하러 갔으나 ‘불편한 자세 때문에  술을 제대로 마실 수 없어서 이내 작별을 고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선구자 우원슈(吳文秀)도 다다오청의 차 상인으로, 25세에 '타이베이 차 상공회' 회장이 된 젊은 부호입니다. 리춘성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1899년 12월, 차 상공회를 대표하여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로 향했는데요. 1900년(메이지 33년) 4월 13일자 <대만일신보(한문판)> 보도에 따르면, 출발할 때만 해도 변발을 하고 창파오를 입었던 우원슈는 홍콩에 도착한 후 의연하게 머리를 자르고 사진을 찍어 타이완에 있는 친척과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경제인이자 정치가인 구셴롱(辜顯榮, 1866-1937)도 변발을 하고 양복을 입은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구셴롱옹전(辜顯榮翁傳)>에는 메이지 32년인 1899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한 장의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에서 구씨는 나비 넥타이와 수트를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제 초기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서양의 조류를 가장 잘 받아들인 사람은 리춘성(李春生)과 구셴룽(辜顯榮)과 같은 상인계급이었습니다. 일제 초기, 총독부가 세운 첫 근대식 학교인 총독부국어학교의 타이완 학생들은 여전히 변발을 늘어뜨리고 수업을 했었죠. 일제시기 7년 차인 1902년 초 이전 신문 기록에 따르면, 변발을 자른 타이완인은 앞서 언급한 리춘성, 구셴롱 등 차 상인 및 지식인층 28명이 전부였습니다. 변발을 자른 사람의 수가 이렇게나 적었으니, 양복으로 옷차림을 바꾼 사람의 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죠. 

다이쇼 시기, 양복이 유행하기 시작하다

그런데 1910년 이후가 되자, 새로운 외관의 남성 이미지가 유행해 점차 지주나 지식인층에까지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완 우펑린가가 남긴 사진집(臺灣霧峰林家留真集)>에 따르면, 1910년 타이완 3대 문인 모임 중 하나인 ‘참사(櫟社)’의 모임 속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칭파오 차림에 변발을 하고 있습니다. 회원 중 한 명인 린셴탕(林獻堂)도 당시에 전통 옷차림을 그대로 하고 있었죠. 그러나 3년 후인 1913년 사진 속 린씨는 더 이상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12명이 함께 찍은 이 사진에서 사람들은 모두 서양식 헤어스타일을 하고, 양복과 넥타이에 모자와 지팡이까지 착용하고 있죠.

일본이 통치하던 50년의 시간 동안 양복은 결코 저렴한 의복이 아니었습니다. 1911년부터 타이완 지식인층에서는 ‘변발을 자르되 복장은 유지한다’는 신조로 근대화의 상징인 변발을 자르는 것과 양복,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양복이 너무 비싸 서양식 옷차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1917년생인 구전푸(辜振甫, 1917-2005) 타이완 시멘트 전 회장이 20대였을 무렵인 1940년, 일본에서 출납사무직으로 근무하며 받은 월급이 75엔이었습니다. 그의 월급으로는 ‘양복 세 벌’을 맞출 수 있다고 했죠. 1925년생인 소설가 예스타오(葉石濤, 1925-2008)는 40년대 초등학교 대리교사였고, 그의 월급은 42엔에 전시수당 6엔을 추가로 받아 첫 월급을 받자마자 그는 양복 한 벌을 맞추는데 5~6엔을 썼다고 합니다. 구전푸가 사고자 하는 양복(한 벌에 약 25엔)에 비해 저렴한 것은 사실이나, 양복은 당시 고가 소비재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죠. 월급쟁이들에게 양복과 모자는 일종의 사치품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전시 기간, 양복에서 '국민복'으로

그러나 2차세계대전으로 접어들어 일본이 미국, 영국과 교전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양복은 ‘적국의 복장’으로 전락하면서 그 열기가 시들해졌습니다. 양복을 입었다가는 손가락질을 받았으니까요. 이란에서 명의로 활동하던 1918년생 천우푸(陳五福)는 전시 기간이 되자 학생들은 모두 카키색 ‘국민복(國民服)’을 입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창파오에서 양복, 그리고 전시기간 국민복까지… 격변의 연속이었던 50년의 식민기간 동안 타이완 남성들의 복장도 끊임없이 변화해갔습니다.  

 

원고/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진행/손전홍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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