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곳곳에 랜드마크를 찾아 현지인만 아는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랜드마크 원정대>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가이드북을 버리세요! <랜드마크 원정대>를 따라 타이완 여행을 즐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랜드마크 원정대> 진행자 안우산입니다.
<랜드마크 원정대> 100번째 시간입니다! 100회를 맞아 타이완 야구 대표팀이 승전보를 전했습니다. 경기 전 일본 언론의 예측에서 12개 팀 중 꼴찌에서 두 번째로 평가받았던 타이완팀은 지난 24일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4-0으로 국제대회 27연승을 달리던 일본을 제압하며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이는 타이완 성인 야구의 첫 국제대회(올림픽, 월드베이스볼클래식 WBC, 프리미어12) 우승이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 32년 만의 대일본전 승리입니다. 무엇보다 일본 야구의 심장인 도쿄돔에서 세계랭킹 1위인 일본을 꺾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죠.
프리미어12의 포스터에는 타이완 선수가 없습니다. 중화민국도 타이완도 아닌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타이완은 완벽한 팀워크, 철저한 분석과 융통성이 있는 전략을 통해 모두의 예상을 깨고 타이완이라는 나라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스타 선수들의 활약에 크게 의존했던 과거 대표팀과 달리, 선수마다 자기의 소임을 다하며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습니다. ‘팀 타이완(TEAM TAIWAN)’이라는 슬로건처럼 선수, 코치, 스태프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타이완 야구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타이완팀의 우승 소식에 온 나라가 열광했습니다. 고속철도 열차 안에서 음료수를 사서 다른 승객들에게 선물하는 사람도 있고, 경기 다음날인 25일 하루 휴무를 선포한 회사도 있고, 11월 24일을 ‘타이완 야구의 날’로 지정하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이번 우승으로 타이완의 야구 열기는 한층 더 뜨거워질 전망입니다. 또 내년 WBC 예선을 앞두고 타이완팀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오늘은 타이완 가장 대표적인 구기 종목인 야구의 발전 역사, 그리고 야구장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24일 저녁 타이베이 신이구(信義區)에서 프리미어12 결승전을 생중계한 현장- 사진: CNA
식민주의 색채가 강한 야구 ⚾️
일본 식민지 시대에 시작된 타이완 야구는 발전 단계에서 식민주의 색채가 짙은 스포츠였고, 타이완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우승은 의미가 남다르죠. 1906년부터 전국 곳곳에 학교 야구단이 설립되면서 야구는 레포츠에서 공식적인 스포츠 경기로 떠올랐습니다. 비록 경기에 나간 선수는 타이완에 있는 일본인을 위주로 했지만, 타이완 야구는 빠른 속도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중 자이(嘉義) 농림전문학교의 야구단은 1931년 일본 고교 야구 대회인 고시엔(甲子園)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이후에도 세 차례 고시엔에 입성했습니다. 농림전문학교의 많은 선수들이 졸업 후 일본 야구계에 진출했습니다. 이 전설의 이야기는 지난 2014년 영화 <카노(KANO)>로 각색된 바 있고, 야구팀의 에이스 우밍제(吳明捷) 선수의 동상이 자이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했습니다.
▲관련 프로그램: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자이(嘉義) 중앙분수대 & 분수대 한가운데 서 있는 야구 전설 ‘카노(KANO)’

'타이완'이라 적혀있는 야구복을 입은 1951년 자이 농림전문학교 야구단 - 사진: 위키백과
국민 스포츠로 부상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권이 바뀌었지만 야구의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밥 먹고 야구 보러 가자(呷飽看野球)’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전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1968년 타이동(台東) 홍예(紅葉) 초등학교의 야구단이 한 친선경기에서 일본에서 온 스타팀을 7-0으로 제압했다는 쾌거를 이뤘는데요. 이 반가운 소식은 타이완 야구계를 고무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 타이완 고교 야구대표팀인 ‘진룽(金龍少棒隊)야구단’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1970년대는 타이완 고교 야구의 전성기였습니다. 진룽야구단은 1969년 미국 윌리엄스포트에서 열린 리틀 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미국과 캐나다를 꺾고 타이완 야구 최초의 세계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타이완에는 민족과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는 중요한 경기였습니다. 그 해부터 1996년까지 약 30년 동안 타이완팀은 17번째 우승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성인 야구는 고교 야구만큼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1971년 유엔 탈퇴 이후 타이완이 어떤 이름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타이완이나 포르모사의 이름으로 참가하면 중화민국의 국격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타이완은 1976년과 1980년 올림픽에 불참했고, 1981년 ‘로잔 협의’가 체결되어서야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1984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같은 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어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다만 그때만 해도 선수들의 대우가 좋지 않아 일본이나 미국에 가는 것은 선수들의 목표였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부득이하게 '포르모사'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타이완 대표팀이 입장 시 간판을 들고 올림픽위원회에 항의했다. - 사진: 위키백과
이어 1990년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되면서 타이완은 일본, 한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프로야구를 출범시키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대부분 에이스들이 프로야구에 합류해 출전하지 않은 타이완 대표팀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일본을 꺾고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프로야구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타이완 야구는 침체 상태에 빠졌는데, 새로운 무대를 찾기 위해 외국에 진출한 선술들이 많았습니다. 이 중 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은 투수 왕젠민(王建民)은 2006년 19승으로 리그 1위를 기록해 ‘왕젠민 돌풍’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번 프리미어12에서는 왕젠민이 투수 코치를 맡았습니다.

프리미어12 투수 코치를 맡은 왕젠민(王建民) 전 메이저 리그 선수 - 사진: CNA
챔피언을 향한 마지막 한 걸음 🏅
비록 타이완 선수들이 국제무대에서 빛을 발했지만, 프로야구 리그에서는 2005년부터 거의 해마다 승부조작이 벌어진 데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09년 WBC에서 타이완에 크게 뒤진 중국팀에 패하는 등 최악의 사태가 잇따랐습니다. 전 국민의 무너진 신뢰와 함께 타이완 야구는 가장 어두운 시기로 진입했고, 2013년 WBC에 되어야 희망의 빛이 보였습니다. 왕젠민을 비롯한 스타 선수들이 대표팀에 합류해 멋진 경기를 펼쳤습니다. 8강전에서 아쉽게 일본에 역전패했지만, 타이완인들이 야구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습니다. 이와 동시에 정부의 적극 지원과 야구단들의 개혁으로 타이완 야구는 또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물은 올해의 우승이죠.
한편, 현재 타이완 프로야구 리그는 중신 브라더스(中信兄弟), 퉁이 라이온스(統一獅), 라쿠텐 몽키스(樂天桃猿), 푸방 가디언스(富邦悍將), 웨이취안 드래곤스(味全龍), 타이강 호크스(台鋼雄鷹) 등 6개 구단이 있고, 홈구장과 지방구장을 포함해 경기장 16곳이 있습니다. 타이베이 돔이 지난해 개장되면서 더 많은 국제대회가 타이완에서 열릴 것으로 기대됩니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은 타이완 야구, 드디어 프로야구 리그 출범 35주년인 올해 첫 국제대회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제 타이완 야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엔딩곡으로 이버 프리미어12의 타이완 주제곡 SevenFat(七月半)의 '함께(就一起)' 를 띄워드리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랜드마크 원정대>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으로 RTI 한국어 방송의 안우산이었습니다.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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