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초기 자본가들의 주식 투자
지난 11월, 2024 미국 대선에서 도날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트럼프 2.0 시대가 도래하자 여러 언론에서는 ‘경제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와 새로운 기회에 대한 기대를 동시에 전했고, 세계 주식 및 가상화폐 시장은 한동안 요동쳤는데요. 주식 시장이 이제는 글로벌화된 요즘, 한 나라의 경제 동향은 그 나라의 동맹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 동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타이완에서 주식시장은 언제 처음 시작되었을까요?
타이완증권거래소가 처음 개업한 해는 1962년입니다. 그런데 타이완 사람들이 처음 주식 시장에 참여했던 것은 1962년이 아닌, 일제시기부터입니다. 국내 주식시장이 부재했던 일제시기 타이완 투자자들은 ‘도쿄주식취인소(東京株式取引所)’에 가서 주식을 매매했는데요. 지금의 말로 하자면 ‘도쿄증권거래소’인 이곳은 이미 메이지 11년인 1878년에 창립된, 상당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일제시기 주식시장에서 가장 큰 수익을 얻은 대표적인 타이완의 부자는 현재 타이완시멘트 회사(台泥) 회장인 구청윈(辜成允)과 중신그룹(中信) 회장인 구롄쑹(辜濂松)의 할아버지, 구셴룽(辜顯榮, 1866-1937)이었습니다. 당시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예룽중(葉榮鐘)과 구셴룽은 동향으로, 예룽중은 1910년대에 일찍이 도쿄에서 구씨 가문의 손님이 되어 구셴룽으로부터 주식에 관해 가르침은 받은 적이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예룽중은 구씨 집안 어르신은 일찍이 주식 투자에 능해서, 매일 도쿄 주식시장이 개장할 때마다 두, 세 명의 직원을 현장에 파견하여 점원과 연락을 취해 "시시각각 전화로 어르신네께 시세를 보고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직원이 주식 수익이 급등하였다고 전했는데, 이미 500주를 매입한 뒤였습니다. 그날 구셴룽은 도쿄 사무실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다 실수로 커튼이 다시 말려 올라가자 그의 마음도 덩달아 펄쩍 뛰었고, 이참에 1,000 주를 더 사들였다고 합니다. 당시 도쿄의 주가는 한 주당 200엔이 넘었는데, 구셴룽은 한 번의 거래로 30만~40만엔을 거래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돈 1만에서 2만엔이면, 붉은 벽돌의 양옥 한 채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즉, 주식에 30만~40만엔을 한 번에 거래했다는 것은 마치 십여 채의 양옥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죠. 한 달에 10~20엔을 벌어 겨우 먹고사는 일반 사람들에게 양옥 한 채는 꿈속에서조차 멀리 있는 일이었으나, 구셴룽에게 10여 채의 양옥은 마치 게임 속 모형으로 만든 작은 집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910년대에 구씨 집안의 총 재산은 이미 상당 수준에 달해 이미 타이완에서 소위 ‘갑부’라 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17년 정월 대보름이 막 지났을 무렵, 신문은 구씨 집안이 도쿄 주식시장에서 50만 엔의 손해를 봤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지금과 같았으면 누군가 상실해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액수의 큰 금액입니다. 그러나 당시 신문은 구셴룽이 오히려 매우 차분하게 대처하며, 설사 몇십만 엔 손해를 보더라도 채권자에게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시기, 매일 도쿄의 주식시장에 관심을 갖고 그곳의 판세를 지켜보는 일은 일반 타이완 사람들에게 있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대신 타이완의 각 주요 도시에 증권회사가 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주식점(株式店)’이나 ‘증권사(證券社)’라고 불리는 증권회사들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대표적인 증권회사로는 1940년 타이베이에 들어온 일본의 ‘노무라 증권(野村證券)’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일반 타이완 사람들은 증권사를 주로 ‘고표점(股票店)’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당시 신문을 보면, 타이완 전국 중 남부 최대도시인 타이난시에서 주식 매매가 가장 성행했는데, 1935년에 이르자 타이난에만 고표점이 40여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평소 고표점에서는 일제시기 당시 최고의 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도쿄 주식시장의 소식을 접하고 전달했다고 합니다.
일제시기 타이완에서의 주식 매매가 이제 막 시작했던지라 그 개념이나 문화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도박성을 띄었는데. 예를 들면, 타이완에 있던 모든 고표점들이 실제로 모두 일본 거래소에서 매수와 판매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표점은 매일 전보나 라디오에 의지하여 장 마감 시세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장과 고객 사이에서 도박으로 승부를 겨뤘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공매도’(개인 혹은 단체가 주식, 채권 등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도하는 행위)를 했던 것인데, 이를 통해서 떨어지는 이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공매도가 상당히 흔했다고 합니다.
상표권 문제
일제시기, 구셴룽과 같은 타이완의 자본가들은 일찍이 주식 외에도 ‘상표권’에도 눈을 떴습니다.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5년차인 1899년, 일본정부는 타이완에서 ‘상표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이듬해 말 타이완 북부에서 가장 번창했던 사업 중 하나인 ‘차(찻잎)’ 상표권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북부의 차 산업은 번창하여 일본은 물론 유럽과 같은 서구에서도 타이완 찻잎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찻잎 판매를 위해 포장지에 눈에 띄는 여러 도안을 찍었는데, 당시 타이완 상인들은 ‘도안’과 ‘상표권’에 대한 관념이 거의 부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도안의 차가 크게 팔리면 다른 차 상인들은 자주 이를 모방하여 따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하나의 같은 도안을 타이완 상인 약 70%가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찍이 이 문제를 발견한 궈춘양(郭春秧, 1860-1935) 제1대 타이베이차상공회의소 출신 상인은 타이완 차 상인 중 가장 먼저 자신이 판매하는 차 상표 외에도 동종업계에서 가장 인기있던 6개의 상표를 모두 자기 소유로 등록했습니다. 같은 상회 소속이었던 다른 18명의 차 상인들은 화가 났지만 발만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는데, 결국 8년을 끌어서야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이 상표권 사건으로 차 상표 등록이 이슈가 되자, 1901년 초 관청은 기한을 정해 앞으로 또 다시 이런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차 상인들로 하여금 빨리 상표를 등록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그러자 차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일반 타이완 상인들도 차차 상표권이란 개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반부터 일이 순조롭게 될리가 없습니다. 초반에는 상표권 침해 사례가 상당히 빈번해서 1910년대에서 30년대까지 신문에는 줄곧 특정 광고가 실렸는데, 이른바 ‘사죄 광고(謝罪廣告)’. 오늘날의 ‘사과문’과 같은데, 당시 대부분의 타이완 상인들은 외국의 여러 브랜드, 이를테면 미국의 미싱 브랜드 ‘싱거(Singer)’, ‘네슬레(Nestlé)’, 일본의 유명 사케 브랜드 '하쿠츠루(白鶴)',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타이거 밤’ 등 유명 브랜드에 사과했습니다. 1935년, 타이완의 유서 깊은 사이다 회사 창립자도 당시 사죄 광고를 낸 적이 있다. 일본 사이다 회사의 로고와 유사한 상표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에 이르자 많은 타이완 상인들은 일본인 가게의 상표 디자인을 모방해 원형이나 마름모꼴 도형 안에 한자를 넣는 도안을 많이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다오청의 석유회사 ‘장동룽상행(張東隆商行)’은 사선이 교차하는 마름모 안에 ‘동(東)’자를 넣는 상표를 사용했는데, 이는 미쓰이 그룹(三井)의 로고와 모형이 같았습니다.
미쓰이 그룹의 상표
이처럼, 일제시기 타이완의 초기 자본가들은 비록 능숙하지 않고,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일본 주식 시장 참여와 상표권 등록을 통해 서서히 자본을 불리고 축적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陳柔縉 《舊日時光》 大塊文化 2012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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