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3일 오늘은 절기상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지기 시작한다는 상강답게 오늘 한국의 날씨는 아침 저녁은 물론 한낮에도 15도 안팎으로 기온이 떨어졌다고 하네요. 제가 있는 이곳 타이베이도 어제 밤부터 내내 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22도까지 뚝 떨어지면서 꽤나 쌀쌀한 날씨를 보입니다. 타이완 중앙기상처에 따르면, 현재 필리핀 동해 해상에서 북서진 중인 태풍 짜미(潭美)와 동북계절풍의 영향으로 타이완 북부는 이번 주 내내 호우가 내린다고 합니다. 그 비가 어제 밤부터 시작되어 타이베이는 오늘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쌀쌀한 날씨입니다.
기온이 뚝 떨어져 날씨가 선선해지니, ‘타이베이에도 가을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집에서는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고, 밖을 나갈 때면 반팔과 반바지와 같은 여름 옷 대신 얇은 스웨터나 가디건을 한 벌 더 챙겨 입습니다. 더운 날씨에는 눈여겨 보지 못했던 책장 속 여러 책들에게도 눈길을 한 번 줍니다. 평소에는 들고 다니지 않았던 얇은 시집이나 산문집, 소설의 제목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한글책과 중문책이 두루 섞여 있는 저의 책장에서 바이셴룽(白先勇)의 <타이베이 사람(臺北人)>이란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1971년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연재했던 14편의 단편소설인 <타이베이 사람>은 1950년대 중국에서 타이베이로 건너 온 여러 사람들의 인생살이를 그린 작품입니다. 당시 타이베이를 둘러싼 인문학 환경과 중국에서 건너 온 외성인들의 타이베이 생활을 묘사한 이 작품은 2024년 현재의 타이베이의 도시와는 사뭇 다른 1960-70년대 타이베이의 일상생활을 사뭇 느끼게 해주죠. 20세기 중화권을 대표하는 대표작가인 바이셴룽의 작품이 한국어로는 아직 번역된 바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아쉬워하며 책장 문을 닫습니다.
최근 한국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으로 한국은 때아닌 ‘한강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0세기 중후반 한국 사회가 겪은 국가 단위의 폭력과 그로 인한 일반인들의 사회적 트라우마를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직면한 그녀가 써내려간 글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죠. 얼핏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녀의 글을 읽고 나면 어딘가 묻어 두었던 감정이 불쑥 튀어나와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아름답다'라고 결론 짓게 합니다.
제가 있는 이곳 타이베이에도 문학과 관련해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타이베이시 문화국에서 2027년까지 타이베이 문학관(臺北文學館)을 완공할 예정이라고 지난 18일 정식 발표했기 때문이죠. 타이베이시정부가 주최하고 타이완문학발전기금회가 기획 및 집행한 이 프로젝트는 지난 18일 타이베이시 상수도사업처에서 최근 신축한 ‘공관빌딩(公館大樓)’에 타이베이 문학관을 설립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공관빌딩은 타이베이 지하철 그린라인 공관역(公館) 1번 출구로 나와 공관 야시장(公館夜市)이 있는 수원시장(水源市場) 옆 골목 뒤에 위치해 있습니다.
타이베이 문학관으로 거듭날 공관빌딩이 위치한 이곳은 국립타이완대학과 구팅 고수부지(古亭河濱公園) 사이로 일명 ‘성남(城南)’으로 불리죠. 장완안 타이베이 시장은 타이베이 문학관 입지 선정과 관련해 “공관빌딩은 타이베이 문학의 성남 역사 맥락을 이어받았다”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타이베이 성남은 다안구(大安區) 남부 지역부터 타이베이 식물원과 난먼초등학교(南門國小)가 있는 중정구(中正區) 남부 일대를 통칭하는 지명입니다. 행정구역 상 정식 명칭은 아니기에 정확한 경계선은 모호합니다만, 타이베이 지하철을 기준으로 그린라인 공관역을 시작으로 타이완전력공사역, 구팅역, 중정기념당역, 그리고 샤오난먼역까지 일대의 남부지역이라고 생각하시면 대강 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사실 ‘성남'이란 용어는 일제시기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데요. 성문의 남쪽, 즉 지금의 샤오난먼에서 구팅 부근까지를 지칭하는 용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제시기에 이 부근에 사범대와 타이베이제국대학을 비롯한 각종 학교가 설립되고, 총독부 전매국이나 임업부 등 각종 중앙정부기관도 이 일대에 들어서면서 성남 지역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타이베이 사람들이 주로 모여살던 다다오청(大稻埕)과 멍자(艋舺)와도 멀지 않았기에 일본 정부가 개발을 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이죠.
이렇게 일제시기부터 학교와 정부기관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성남은 20세기 다양한 문학인들이 탄생하는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국립타이완대학교 중문과에서 20여 년 간 학생들을 가르치고 중문학과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 타이징눙(臺靜農, 1902-1990)과 국립사범대학교 문과대학장을 지낸 량스추(梁實秋, 1903-1987) 등이 모두 이곳 성남 출신이면서 동시에 1984년 국가문예상을 수상한 바 있죠.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학인을 중심으로 성장한 성남 일대는 타이베이 도심에서 가장 인문학적인 성격이 짙은 지역입니다. 타이완에서 손꼽히는 주요 대학인 국립타이완대학교와 국립사범대학교가 자리한 것은 물론, 타이완 현대문학의 기지라고 일컬어지는 타이베이시 최초의 문학 전문 예술문화 공간인 기주암(紀州庵)과 일제시기 옛 건축물을 활용해 예술문화공간으로 재거듭나는 자허신춘(嘉禾新村)도 있죠.
타이베이 문학관 장소가 정해지자 장만쥐안(張曼娟, 1961- ) 작가는 작가 대표로 “타이베이 출신 작가로서 타이베이 문학관이 곧 개관하는 것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고 전하며 무려 15년 전 주변 작가 동료들과 함께 문학관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타이베이에 살았던 여러 작가들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마침 꿈이 실현되어서 너무 기쁘다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습니다.
마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하고 자신을 이끌어주고 자신과 함께 한 한국 문학계에 고마움을 표시했듯,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한 명, 한 명에게 타이베이는 단순히 지명 그 이상으로 자신의 문학적 토양을 길러준 곳이자, 주변 동료 작가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이었겠구나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난 18일 타이베이시정부의 ‘타이베이 문학관' 설립 공식 발표와 더불어, 타이베이 성남 일대에서는 당분간 타이베이와 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릴 예정입니다. 앞서 언급한 자허신춘(嘉禾新村)에서는 지난 19일 ‘타이베이를 읽다(讀臺北:複寫一座城市的練習)'라는 제목의 타이베이 문학관 준비처의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오는 26일, 27일 주말 ‘타이베이의 오후, 산책(臺北午後.漫步調)’이란 포럼을 열어 타이완 현대문학의 탄생지라고도 할 수 있는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다양한 문학의 시대별 풍경과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청취자 여러분들께서 살고 계신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한 번 즘 꺼내어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엔딩곡으로는 미국가수 슐렘(Shulem)의 악토버레인(October Rain)을 띄워드립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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