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먼 답사 1-심리전
- -2024.06.10.-타이완 ㆍ한반도 ㆍ양안관계 ㆍ시사평론-
- -등려군 확성기 방송 현장 목소리(일부)-
- “사랑하는 대륙 동포 여러분, 저는 덩리쥔입니다…”로 시작되는 대대륙방송은 이미 오래 전의 것이지만 지금도 진먼에 가면 들을 수 있다.
- 북녘/북, 뫼/산, ‘북산파음장’-‘베이산’ 확성기방송벽이라 불리는 곳에서 녹음한 것임
비록 지금은 심리전으로 확성기 방송을 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덩리쥔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까운 푸졘성 샤먼은 물론 대륙 전역으로 송출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방송은 대륙 주민들에게 분명 영향력을 발휘했으리라 믿는다. 지금 한반도에서도 북한의 오물 풍선 투하, 한국의 확성기 방송을 통해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띄어주며 남북한의 긴장감을 더해주는 현상을 보면서 양안 사이에서도 예전에 얼마나 치열한 심리전을 펼쳤을까를 상상해 보게한다.
진먼에서 가장 큰섬 ‘대금문섬’을 다녀왔다. 진먼에 가기 전에 많은 자료를 다시 읽으며 숙지하고 준비하였는데 직접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우선은 현지에서 전혀 긴장감이라는 걸 엿볼 수 없었고, 만나 본 현지인들은 극히 태연했다. 그들은 가까운 샤먼과 푸졘성 연안 지역과의 교류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심리적으로 타이완섬과의 거리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평소 타이베이에서 양안 긴장 고조를 언급할 때 진먼섬에서 당장이라도 충돌이 발생할 것처럼 말해왔다. 하지만 진정한 진먼 현지 주민들은 매우 태연하다. 그들은 베이징과 타이베이, 그리고 워싱턴과 베이징 간의 갈등 모두 진먼섬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진먼런-金門人’이라 자칭한다.
3년여 전 양안간 ‘심리전’에 관해 방송한 바 있다. 당시 심리전을 주제로 했던 이유는 한국에서 일명 ‘대북전단 금지법’의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이 시행되어 만약 대북전단을 남북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보낼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한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된다는 이슈 때문이었다. 3년여가 지난 오늘날 북한에서 오물 풍선을 띄워오자 한국에서도 강 대 강으로 대처하며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였다는 최신 소식을 생각하며 진먼섬에서의 보고 느낀 점을 추후 시리즈로 보도하고자 한다.
양안간의 심리전은 1949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중화민국의 심리전은 일본을 상대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918사변’ 때 일본 군국주의는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하여 3개월여 만에 점령하고 1932년 3월1일 일본제국 참모본부와 관동군이 ‘만주국’을 세웠다. 현대사 속의 중화민국은 일본군 침략에 계속 후방으로 밀려났는데, 일본군이 또 ‘77사변-노구교사변(1937년)’을 일으켜 베이징과 티엔진이 속해 있는 화북지방을 손에 넣었다. 이 사태로 장졔스는 대일본 전면항전을 선언했는데 수도 난징마저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며 일본군의 악랄한 ‘난징대학살’이 벌어졌다. 수도 난징을 빼앗긴 중화민국 정부는 후방인 스촨성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충칭에서 콜사인 ‘XGOY’로 각종 언어의 대내외 방송을 통해 전국 및 국제사회에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선전용 방송을 한 것을 현대사에서의 최초의 심리전으로 간주하고 있다.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한 건 사실이지만 민족적 정통성을 고수하며 타이베이를 임시 수도로 정하여 타이완.펑후,진먼.마주의 섬들을 실질 관할하며 정치 민주화, 경제 발전과 문화의 전통 유지와 창조력 등 방면에서 높은 성과를 거뒀다.
오늘날의 평화 번영을 누리기 전 양안 간에는 수 차례의 충돌이나 전투와 위기가 있었다. 타이베이와 베이징 모두 처음에는 서로 ‘통일’을 추구하였고 타이베이당국은 본토 수복을 궁극적 목표로, 베이징당국은 국민당정부 섬멸을 목표로 하면서, 각자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에는 진먼섬 구닝터우 전투(1949년)와 823포전(1958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중화민국 국군의 승리로 타이베이당국이 1970년대부터 문화와 경제 방면에서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바로 진먼섬이 중화민국을 지켜준 최고의 공신이라고 여겨진다.
타이완에서 중국대륙으로 보내는 중파와 단파 방송 및 진먼섬과 마주섬에 설치한 확성기 방송을 통한 심리전은 20세기 90년대 초반에 중단되었다. 그건 80년대 말기 양안 간이 대화를 통해 담판과 인적교류가 이뤄지면서 1991년4월24일 중국은 진먼섬과 마주 한 샤먼에 설치했던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였고, 진먼은 그 다음해인 1992년11월7일 ‘전지정무(戰地政務)’가 해제됨과 동시에 대 중국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진먼에서 최초로 확성기 방송을 한 건 1953년 쟈오위(각서角嶼)에서 시작한 것으로 당시 중화민국 국군이 중국대륙을 향해 선전 방송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쟈오위는 행정구역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푸졘성 샤먼시 샹안구에 속해 있는 푸졘성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이젠 거주하는 주민은 없고 해방군 푸졘성 군구의 변경 해안 방위 부대가 주둔해 있고 ‘동남제1초소’로 불리고 있다. 사실 쟈오위(각서角嶼)섬은 진먼섬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며 본래 중화민국 관할이었으나 양안 전투에서 중공이 점령한 곳이다.
50년대에는 양안간의 열전이 몇 번 발생하였으나 60년대는 심리전이 주축을 이뤘다. 또한 1962년 중공의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며 총체적 국력이 쇠락해졌는데 당시 중화민국 총통 장졔스(장중정)는 본토수복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며 군부대 배치를 적극 조정하는 한편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하였으나 실천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1961년에서 1972년 사이 추진한 비밀 작전을 통해 특전사와 정보원을 대륙으로 밀파하여 대륙 각 지에서 혁명운동을 일으키려 했었다. 이 시기는 해협 위기라고 정의하지는 않지만 당시 장졔스 총통은 본토 수복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겼으리라 사료된다. 본토 수복 작전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장졔스는 1975년에 타계하였다.
확성기 방송은 대륙 연안과 가까운 진먼과 마주에서 진행되었다. 진먼의 예를 들어 국군은 마산(馬山), 다단다오(대담도大膽島), 후징터우(호정두胡井頭), 구닝터우(고녕두古寧頭) 등지에 각각 확성기를 설치하였다. 48개의 확성기를 콘크리트로 만든 벽면에 부착하여 중국대륙 방향으로 방송을 하는 것인데 그 소리는 25킬로미터까지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확성기 방송은 ‘선전’을 주로 하며 이 외에는 ‘투항 권고’와 상대방 정권에 대한 비판, 그리고 뉴스와 음악 등의 내용이었다. 예전 진먼 확성기 방송에서 덩리쥔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건 나중에 양안간 인적교류가 이뤄진 초기 때 대륙 주민들이 덩리쥔의 노래를 부를 줄 알 정도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며, 한때 중국대륙에서는 ‘낮에는 대등(大鄧 = 덩샤오핑鄧小平), 밤에는 소등(小鄧 = 덩리쥔鄧麗君)을 듣는다’는 말까지 퍼져나온 것도 확성기 방송의 위력을 입증하였다고 본다.
그 외에 라디오방송은 심리전 선전용 방송으로 가장 크게 활약했다. 지금 Rti-타이완의 소리 방송은 재단법인으로 조직이 개편된 지 30년이 넘었는데, 그 이전에는 국방부 산하의 심리전 방송국이었다. 이 외에 ‘자유중국의 소리’는 1949년부터 대륙을 향해 방송을 하였었다. 당시 베이징어, 민남어, 학카어, 광동어, 차오저우(潮州)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등 각 지방의 다양한 언어 방송이 있었다. 심리전에 사용된 군 소속 방송은 ‘광화의 소리’, ‘군중(軍中)의 소리’, ‘부흥 방송’, ‘한성(漢聲)방송’ 등 여럿이 있다. 이 가운데 ‘한성’과 ‘부흥’의 일부 주파수는 대륙의 중앙방송에 전파 방해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심리전 방송이나 확성기 방송, 풍선으로 띄우는 전단지,,,,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가까운 한반도에서 최근에 선전용 또는 교란하기 위한 풍선과 확성기 방송이 재개된 것을 보면 우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듯하다. -白兆美
(진먼 취재 관련 프로그램과 영상은 추후에 시리즈로 방송할 예정입니다.)-취재.보도: 백조미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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