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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 (p.s. 중화민국 국경일 축하합니다!)

  • 2023.10.10
대만주간신보
타이완의회기성동맹회 회칙. 다이쇼 12년(1923) 2월 16일. - 사진: 위키피디아

오늘 10월 10일은 중화민국 건국 112주년을 기념하는 쌍십절 국경일입니다. 올해 국경일의 슬로건은 ‘민주주의의 타이완, 지속가능한 회복력(民主台灣 堅韌永續)’으로 중화민국 타이완의 영속성과 회복성에 대한 기대와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총통부에서 주관하는 국경일 행사의 행사집행위원장을 맡은 유시쿤(游錫堃) 입법원장은 국경일 축전의 포문을 여는 치사를 통해 타이완의 민주가치와 국제사회에서의 타이완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유시쿤은 국내외 귀빈들과 타이완 국민들, 해외교포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인사를 드린 뒤 곧바로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台灣議會期成同盟會)’를 언급했는데요. 유시쿤의 치사에서 왜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를 언급했는지,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가 타이완 민주 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오늘 <대만주간신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유시쿤의 입법원장이 치사에서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를 언급한 부분 다시 한 번 들어보시죠. 

“오늘은 중화민국 112년 국경일입니다. 대회를 대표해 참석하신 국내외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환영의 뜻을 표합니다! 올해는 타이완 역사상 처음으로 법에 따라 설립된 정치 결사 '대만 의회 기성 동맹회'가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 전 설립된 이 정치 결사는 오늘날 타이완의 민주적 성취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하며, 전 국민이 백 년의 노력을 통해 축적한 성과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올해 국경일 주제에서 우리는 특히 ‘민주주의의 타이완, 지속가능한 회복력’이란 슬로건을 채택해 국민 및 교포들과 함께 격려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가 주권을 수호하려는 대만인들의 의지와 결의를 표현했습니다.”

국경일 치사에서 가장 먼저 던진 화두인 민주주의, 그 민주주의의 역사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유 입법원장은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를 언급하며 올해 설립 100주년임을 강조했습니다.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는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1921년부터 시작한 의회 설립 운동의 결과로 설립된 정치 결사입니다. 동맹회가 정식으로 결성된 날은 다이쇼 12년인 1923년 2월 16일로, 당일 제정된 타이완의회기성동맹회 회칙 제2조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습니다. 

“제2조, 본회는 타이완 특별 입법의회를 촉진 설치를 목적으로 한다.”

도쿄 지나부의 타이베이 및 타이완섬 내 중요각처에 본부를 두고 있는(제4조)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는 대표자가 매년 일본 제국의회를 대상으로 타이완의 의회 설치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제5조)하고자 결성된 단체입니다. 

1895년부터 일본의 식민지배 하에 놓인 타이완 사람들은 일본 정부의 통치 하에 정치 결정권이 전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도쿄와 타이완 섬을 오고가며 제국과 식민지의 정치, 사회, 문화를 직접 경험한 타이완 각 지역의 유지층과 지식인들은 타이완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의결권을 갖고 의회를 통해 자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 마음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의회 운동의 불씨를 지핀 것은 바로 이른바 ‘63법’의 조문 내용이었습니다. 메이지 29년인 1896년 타이완 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타이완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법령에 관한 법률’ 제63호 시행으로 타이완이 일본령 식민지가 되면서 입법체계 역시 점차 일본의 체계에 편입되었습니다. 문제는 타이완의 모든 체계가 일본에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 본토의 민주권을 타이완 사람들은 향유할 수 없었던 데 있습니다. 

'63법'을 타이완 총독부 독재의 근거로 본 타이완 지식인들은 민족자결운동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63법'의 폐지를 주요 임무로 삼았습니다.1914년부터 린셴탕(林獻堂), 차이파이훠(蔡培火) 등 도쿄의 타이완 유학생들은 타이완동화회(臺灣同化會)의 참여를 통해 일본 측 동정자들의 지지를 구하는 한편 계발회(激發會)를 조직하여 폐지운동을 하고, 기관지 <대만청년>과 <대만>에 타이완의 정치적, 법적 권리를 쟁취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1920년 11월 '63법'이 만료되기 전, 당시 타이완 총독이었던 덴한 지로(田健治郞)가 "본섬의 현 상황이 본법을 폐기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발언하자, 200여 명의 신민회 회원들이 같은 달 28일, 후지미초(富士見町)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도쿄의 타이완 유학생 단체인 계발회는 중국의 량치차오(梁啟超)가 1900년대 초반에 주장한 ‘신민(新民)설’과 ‘신민(新民)사상’의 영향을 받아 1920년 1월 타이완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타이완 의회 설치 청원운동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신민회의 발기로 시작하게된 타이완 의회 설치 청원운동은 일본의 통치에 대한 기존의 무력적인 저항에서 근대식 정치운동으로 전환된 전환점이라는 평가를 받는 일제시기 가장 큰 규모의 정치운동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입헌정치의 정신에 따라 타이완 의회를 설치해 타이완 총독부의 입법권을 타이완 민중들에게 돌려줘라’입니다. 1921년 1월 신민회 회원들은 일본 제국의회에 청원서를 처음으로 제출합니다. 1921년을 시작으로 의회 청원 운동이 중지된 1934년까지 14년에 걸쳐 총 15차례의 청원서가 제국의회에 보내졌습니다. 

타이완 의회 기성 동맹회(台灣議會期成同盟會)는 이렇게 의회 청원 운동이 진행중이던 당시 이 운동의 지도자인 차이페이훠(蔡培火)와 장웨이수이(蔣渭水) 등이 결사의 중요성을 깊이 느끼고 상설 단체를 조직하여 장기 항쟁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설립되었습니다. 청원 운동이 제3차까지 진행되었을 때 동맹회를 조직했죠. 타이완 총독부는 타이베이에서 조직의 설립을 불허했고, 대만 의회 기성동맹회는 도쿄에서 재결성했는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정부는 이를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보고 동맹회 회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부터 시작된 의회운동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동맹회 설립 이후 일본 여론의 지지와 타이완 국민의 동정을 얻어 참여자 수가 정점을 찍었습니다만, 1931년 타이완 민중당이 해산된 뒤 지지단체를 잃고 일본 정부의 파시즘에 짓눌려 1934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타이완 의회 청원 운동은 일제시기 일본 식민정부의 정치적 압제에도 불구하고 타이완 사람들의 법치 확립과 헌법 정신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비록 동맹회는 해산되었지만, 1935년 일본 정부가 주, 시, 거리, 장 의원의 절반을 민선으로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타이완 지방 자치의 시작으로 간주됩니다. 

100년 전 식민지 타이완에 살았던 지식인들의 핵심 주장은 바로 ‘민선’에 의한  '자치주의'였습니다. 지금의 민주주의와 유사하죠. 오늘은 중화민국의 건국 112주년 국경일입니다. 유시쿤 입법원장의 치사에서와 같이 타이완은 과거 역사에서 일본을 포함해 400년 동안 끊임없는 식민지배와 38년간의 군사통치라는 ‘분투’의 역사를 살아내왔습니다. 100년 전 의결권과 정치참여 권리를 위해 투쟁한 타이완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지금 우리가 쟁취해낸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일겁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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