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인 오늘.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이 오늘 오전 10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습니다. 여느 광복절과 마찬가지로 행사에는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유족들, 그리고 국가 주요 정계 인사들과 외빈들이 참석해 한국의 광복절을 기념했는데요. 올해 광복절 행사는 백수를 맞으진 김영관 애국지사님과 올해 100세로 상수를 맞으신 오성규 애국지사님께서 포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김영관 님은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강제동원돼 중국에 주둔하다가 목숨 걸고 탈출해 한국광복군에 입대, 중국 유격대와 합동으로 광복할 때까지 전투에 임하셨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신 오성규 님은 광복 직후 정치적 혼란 속에 국내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셨다가 생애 마지막은 고국에서 보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70여 년만에 환국하셨다고 합니다. 광복절은 한국의 국경일이자 법정공휴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더 나아가 1948년 같은 날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의 광복절은 언제일까요? 광복절을 맞은 오늘 <대만주간신보> 시간에는 타이완의 광복절에 관해 이야기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표준시각으로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낭독한 ‘대동아전쟁 종결 조서(大東亞戰爭終結ノ詔書)'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제국 전역에 울려퍼졌습니다. 식민지였던 한국에서도 동아방송에서 단파방송으로 동시간대에 전달했고, 한반도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령이었던 타이완과 만주국, 중국 점령지 등에도 실시간으로 방송이 진행되었습니다.
정오 시보가 울리자 아나운서가 “중대한 발표가 있겠으니 전국의 청취자들은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안내하고 이어 일본 정보국 총재가 “지금부터 삼가 옥음을 방송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마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됩니다. 그리고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한다.”로 시작하는 히로히토 일왕의 조서 낭독이 약 4분 30초 가량 이어집니다. 2015년 8월 1일 일본 궁내청에서는 종전 70주년은 기념해 히로히토 일왕의 종전 선언 방송 녹음 원판의 사진과 음성을 디지털화해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먼저 78년 전 이 날 히로히토 일왕의 종전 선언 방송 음원을 들어보시죠. (공개음원)
이 조서에서 히로히토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과거 미국과 영국을 대상으로 일본이 선전포고를 한 까닭은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었으나 지난 4년 간의 교전에서 거듭되는 백성들의 살상에 그 참해가 막대해 공동선언에 응했다고 언급하며, 세계와의 신의를 지키면서 일본의 불멸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히로히토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낭독한 조서가 당시 일본 헌법 등 공문서에서 사용했던 문어체였던 까닭에 이 연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당시 일반 일본인들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조서는 일본의 ‘항복’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일본정부가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이도록 지시받았다고만 진술했죠. 게다가 라디오 방송의 낮은 음질까지… 일본제국 전역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본 천황의 첫 라디오 방송은 일본이 항복했는지 여부를 확신하지 않은 많은 청취자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식민지였던 한반도에도 실시간으로 방송이 되었는데, 단파방송의 특성상 수신이 잘 되지 않는 지역에서는 음질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당시 일본어를 구사하는 한국인도 30%가 채 되지 않았기에 조선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로히토의 선언이 방송됨과 동시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장면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죠. 오히려 그 다음날인 8월 16일 조간신문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뛰어나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9일 서울에 있던 일본 정부 청사의 일장기는 미군들에 의해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날 과연 또 다른 일제의 식민지인 타이완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우선 타이완의 광복절은 한국과 같은 8월 15일이 아닌 10월 25일입니다. 타이완이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중화민국에 반환된 날을 기리기 위한 기념일이죠. 한국의 광복절과 같이 공휴일도 아닙니다. 광복절이 히로히토가 종전 선언을 한 날이 아니라는 점, 공휴일도 아니라는 점을 통해서 타이완에서의 광복은 한국에서와는 광복의 개념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45년 10월 25일 오전 10시 타이베이 공회당(현 중산당中山堂)에서는 일본의 타이완 항복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는 일본군 대표와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표, 타이완 인민대표, 그리고 연합군 대표 등이 한 자리에 모였죠. 당시 일본 타이완총독이자 일본제국 소속 제10방면군 사령관인 안도 리키치(安藤利吉)가 일본군 대표로 참석해 항복문서에 서명했고 해당 문서를 중화민국 대표인 천이(陳儀) 장군이 넘겨받습니다. 제작년 10월 타이완의 76주년 광복절을 맞아 손전홍 아나운서가 레트로타이완 시간에서 항복선언식에 대해 소개해드린 바 있으니 다시 들어보시는 것 추천드립니다. (다시듣기)
한국에서는 광복절이 ‘독립'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타이완 즉 중화민국에서의 광복절은 타이완 섬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다 중화민국으로 다시 편입된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정치적으로 중국으로부터의 타이완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타이완광복절은 오히려 새로운 식민 통치의 시작이라고 여길 만큼 해당일을 마냥 즐겁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고 합니다. 2000년 12월 중화민국 정부는 ‘기념일 및 공휴일 시행 조치'라는 법안의 개정안을 공포해 광복절의 공휴일을 취소하기도 했죠.
일본식민통치의 가장 잔인한 부분은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피식민자들은 영원히 ‘이등 시민'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는 점에 있죠.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일본 식민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인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진정한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민족적 다름으로 인해 모국어 사용과 정치권이 박탈된다는 것이 식민통치의 가장 잔혹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타이완도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로히토의 종전이 선언된 1945년 8월 15일, 그간 타이완 섬에서 일본 식민 통치를 몸소 겪어 온 타이완 사람들은 이제 ‘이등 시민'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기대에 한껏 들떠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이완의 광복절이 타이완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은 사람들에게 ‘일등 시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는지는 물음표입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잇달아 찾아온 국민정부의 또 다른 패권에 타이완 사람들은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반일 사상이 강했던 초기 중화민국 정계인과 군인들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타이완인들을 불신했고, 일제시기 타이완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갖고 있던 타이완의 문화적 주체성과 정치적 지위에 대한 기대감은 새로운 중화민국 정부의 민족주의 사관과 부딪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나라인 중화민국에서도 한동안 ‘이등 시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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