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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중국의 타이완 유학생 2: 광둥타이완혁명청년단

  • 2023.08.01
대만주간신보
광동타이완혁명청년단의 기관지 '타이완선봉(台灣先鋒)'의 실린 창립기념 글 - 사진: 중국 전국보간색인(全国报刊索引)

타이완 신베이시 종허(中和)에 소재한 국립타이완도서관(國立臺灣圖書館). 국립타이완도서관의 6층에 있는 ‘본토교육자원(本土教育資源)’이란 코너 안에는 ‘일치시기타이완민족운동사료(日治時期臺灣民族運動史料)’라고 해서 일제시기 타이완과 주변 국가들에서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타이완이 독립되기를 바라며 운동에 매진했던 사람들의 자료를 모아놓고 있습니다. 해당 서가로 들어갔더니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바로 장선체(張深切). 서가의 한 켠에는 장선체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가 다음과 같이 나와있습니다.   

“장선체(張深切, 1904-1965). 난터우 차오둔 출신. 1917년 린셴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 1923년 중국으로 가 상하이에서 유학. 같은 해 상하이의 타이완 유학생 쉬나이창(許乃昌), 차이후이루(蔡惠如) 등과 함께 ‘상하이타이완청년회’를 창립. 1924년에는 다시 상하이에서 셰쉬에홍(謝雪紅), 차이샤오간(蔡孝乾) 등과 타이완 민주 자치를 기원하는 ‘타이완자치협회(臺灣自治協會)’를 설립함. 1927년에는 광저우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해 루쉰 문하에서 공부하고 광저우에 유학 중이던 장슈저(張秀哲), 궈더진(郭德金), 린원텅(林文騰), 리여우팡(李友邦) 등 타이완 동료들과 ‘광둥타이완학생연합회’와 ‘타이완혁명청년단’을 설립하고 기관지 <타이완선봉>을 발행해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함. 1927년 8월 타이완에 돌아온 후 체포되어 1930년 출옥 후 허지비(何集璧)와 ‘타이완연극연구회’를 발기함. 1934년에는 ‘타이중신문’에서 기자와 편집 일을 맡았으며 동시에 타이중에서 ‘타이완문예연맹(臺灣文藝聯盟)’을 설립해 위원장을 맡고 기관지 <타이완문예>을 주필하면서 당시 타이완 작가들의 단결과 타이완 신문학 운동의 고조를 불러일으킴. 1938년 베이징으로 도피함. 전후에는 타이중사범학교 교무주임을 역임했고 228사건 때 누명을 뜨고 난터우에 은거하면서 문화, 사상, 철학에 관한 저서를 잇달아 출판함. 1957년 류치광(劉啟光), 허용(何永) 등과 예린영화사를 결성해 타이완어 영화 ‘추망사(邱罔舍)’를 제작, 제1회 금마장을 수상함. 1965년 11월 폐암으로 서거.”

정치운동을 시작으로 연극, 문학, 영화까지 섭렵한 장선체라는 인물만 들여다 봐도 <대만주간신보> 한 달치 내용이 나올텐데요. 오늘은 그의 행적 중 타이완인의 중국 유학에 초점을 맞춰봅니다. 지난 시간 ‘상하이타이완청년회’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광둥으로 이동해 ‘광둥타이완학생연합회’와 ‘타이완혁명청년단’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1927년 광저우중산대학 정치과에 입학해 루쉰 문하에서 공부하고 광저우에 유학 중이던 장슈저(張秀哲), 궈더진(郭德金), 린원텅(林文騰), 리여우팡(李友邦) 등 타이완 동료들과 ‘광둥타이완학생연합회’와 ‘타이완혁명청년단’을 설립하고 기관지 <타이완선봉>을 발행해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종사하기 시작함. 1927년 8월 타이완에 돌아올 때 체포되었다”

이 짧은 한 문장 안에 숨어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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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생의 장화 출신인 린원텅(林文騰)은 어릴 적 타이완의 한 제당회사에서 일을 하다 유학을 꿈꾸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고향 장화 베이도우로 돌아와 초등학교인 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죠. 이 때 린씨는 일본인들이 타이완인들 괴롭히는 것을 자주 목도했습니다. 유학까지 다녀온 그였지만 타이완인을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반일 감정이 싹트면서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들에 가입하게 되죠. 타이완문화협회(臺灣文化協會)에 가입하고, 타이완 의회 청원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러다 일본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1924년 가을 중국 상하이로 피신을 가게됩니다.  이듬해인 1925년 봄, 린씨는 광둥성에 있는 황푸군관학교 3기에 입학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젊은 청년들이 모여있는 중국의 대학가에서는 국민혁명운동이 한창 진행중이었습니다. 링난대학(嶺南大學)에서 유학중이던 타이완 학생 장위에덩(張月澄)은 1926년 6월 광둥일보에 “타이완의 아픈 역사, 한 명의 타이완인이 중국 동포에게 알리는 글(台灣痛史,一個台灣人告訴中國同胞書)”을 투고했고, 중국 광둥 출신의 양청지(楊成志, 1902-1991)는 “타이완을 잊지 않는다(毋忘台灣)”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타이완 전역에 비밀리에 배포하기도 했죠. 그리고 같은 해 12월, 중국에 유학 중이던 타이완 청년들, 특히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은 광둥의 중산대학에 모여 ‘광둥타이완학생연합회’ 결성하였습니다. 

광둥타이완학생연합회에는 아나키스트가 된 린원텅을 비롯해 장선체(張深切), 궈더진(郭德金), 홍샤오탄(洪紹潭), 우원선(吳文身), 루빙친(盧炳欽), 지엔진밍(簡錦銘) 장위에덩(張月澄) 및 공산주의자 셰원다(謝文達) 등 타이완 유학생 20여 명이 가입했습니다. 중산대학 총장과, 황푸군사학교 정치부 주임, 국민당의 당주임 등 주요 정계요원들도 모두 창립총회에 초청되었죠. 이들은 매월 중산대학에서 연구회와 강연회 등을 열면서 서로의 지식을 공유해 갔습니다. 처음에는 특별히 혁명을 목적으로 조직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이완의 일본식민정부는 1926년부터 이들의 각종 행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타이완 청년과 학생들은 중국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 및 민남 일대에 반일조직을 결성했기 때문에 이 연대를 타격하는 것은 타이완 청년 조직을 숙청하기 위한 일본식민정부의 하나의 미션이 되었습니다. 

광둥타이완학생연합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학생연합회의 지도부에서는 광둥지역의 혁명운동 분위기에 자극을 받은 나머지 중산대학에서 정례회의를 거행할 때 본 학생연합회를 ‘혁명단체’로 바꾸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이 통과되면서 학생연합회는 이듬해인 1927년 ‘광둥타이완혁명청년단’으로 개명했습니다. 여기에는 린원텅과 궈더진, 장선체가 회칙과 강령의 초안위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혁명청년단으로 개명하자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타이완 독립과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중국, 일본, 타이완 각지에 신문과 홍보 문서를 배포하고, 타이완의 '문화협회(文化協會)'와 연락해 린원텅을 책임자로 해서 <타이완선봉>이라는 기관지 발간했습니다. 이 잡지에는 “대만은 대만인의 대만이다(台灣是台灣人的台灣)”, “대만민중의 단결(台灣民眾團結起來)”, “대만농공상학 연합(台灣農工商學聯合起來)”, “세계피압박계급 연합(世界被壓迫階級聯合起來)”, “일본식민정책 타도(打倒日本殖民政策)”, “대만혁명 성공 만세(台灣革命成功萬歲)”, “동방 약소민족 해방 만세(東方弱小民族解放萬歲)”, “세계 혁명 성공 만세(世界革命成功萬歲)” 등의 혁명적인 표어를 게재해 타이완 대중들에게 일본제국 권력에 맞서 분투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7년 4월 중국에서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의 초기 혁명 진영을 대상으로 무력을 동원한 진압을 단행하는 412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광둥타이완혁명청년단'은 일본식민정부와 국민정부 모두로부터 진압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국민정부 광둥당국은 이들을 좌편향 단체로 규정하고 같은 해 6월부터 주요 지도자 2명을 먼저 체포하는 한편 해산 명령을 내리고 강력한 단속을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국민정부의 정보수집 협조를 얻어 얼마 지나지 않아 타이완 섬에서 이 단체의 관계자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고, 8월부터는 타이완, 일본, 상하이 등에서 중국국민당과 일본정부가 연합하여 단체 관련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일본 경찰은 중국 영토에서 이 연대의 주요 지도자인 린원텅과 장선체, 궈더진을 체포해 타이완으로 돌려보내 구금하도록 했습니다. 총 64명이 관계자로 확인되었으나 실제로는 32명이 체포되었고, 체포된 이들은 일제 법에 따라 타이완으로 귀환 조치를 당한 것은 물론, 재판 결과에 따라 린원텅은 4년, 장선체와 궈더진은 3년의 징역살이를 해야했습니다. 

광둥타이완혁명청년단은 1920년대 중반 중국 광둥지역을 중심으로 유학하던 타이완 학생들의 투쟁적인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국민정부와 일본 식민정부가 손을 잡고 이 단체를 해산시킨 사실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공식적으로 속하지 못한 식민지 타이완의 애매모호한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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