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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중국의 타이완 유학생 1: 상하이 타이완 청년회(上海台灣青年會)

  • 2023.07.11
대만주간신보
1926년 7월 31일 에 실린 '타이완독립운동(臺灣獨立運動)' 기사 - 사진: 조선일보

중국, 중국은 일제시기 타이완 학생들의 주요 해외 유학지인 일본 외에 또 다른 선택지였습니다. 당시 상하이는 영국과 프랑스, 일본 등의 조계지 등이 활발하게 형성되면서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웠으며 각종 정치 사상과 종교 신앙을 허용하는 몇 안되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상하이의 영국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조선공산당 등 각양각색의 단체들이 생겨났고, 타이완 유학생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하이에서 항일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타이완인의 중국 유학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유학을 원하는 타이완 학생들은 선원으로 변장하여 밀항하거나, 일본에 갔다가 중국으로 넘어가거나, 혹은 타이완 지룽(基隆)에서 상하이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정기노선에 탑승해 상하이에서 하선하는 등 다양한 신분이나 형식을 통해 몰래 넘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12년 중국의 신해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본 타이완 학생들은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국민당과 공산당 합작, 1924년 황푸군관학교 설립 등 중국 각지에서의 혁명 열기가 끓어오르는 환경에서 유학한 타이완 청년들은 이곳 중국에서 타이완의 해방 운동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습니다. 특히 상하이, 광둥, 베이징에서 민족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을 더 잘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차이샤오간(蔡孝乾), 웡쩌성(翁澤生), 셰쉐훙(謝雪紅), 린무순(林木順) 등 타이완 유학생들은 당시 공산당의 가르침이 활발했던 ‘상하이 대학'에서 취추바이(瞿秋白)와 천두슈(陳獨秀)의 가르침에 따라 타이완 공산주의 운동의 적극적인 일원이 되었습니다. 

1923년 10월 12일, 타이완 민족자결주의자였던 차이후이루(蔡惠如), 일본 사회주의 단체인 ‘효민회'에 가입한 펑화잉(彭華英), 중국의 국공합작 이후 공산주의로 기운 쉬나이창(許乃昌) 등 세 명은 공동으로 상하이 남방대학에서 10여 명의 타이완 유학생을 모아 '상하이 타이완 청년회'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학생들의 친목 다짐을 명분으로 중국국민당과 접촉하고 소련 영사관을 드나들며 ‘타이완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1923년 상하이 타이완 청년회의 창립 이래 전개한 활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24년 1월 상하이 타이완인 대회를 열어 지난 해 12월 타이완 총독부가 타이완 의회 설치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체포한 사건에 반대하는 항의를 보였고, 같은 해 5월에는 ‘중국국민대일외교회'가 주최한 ‘국치기념대회'에 참가해 ‘타이완 일제식민지 반대'라는 전단지를 뿌리며 “함께 단결해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타이완인이 자유와 독립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같은 해 6월 17일, 즉 일본 정부가 타이완의 통치 시작을 기념하는 날인 ‘시정기념일'에도 ‘타이완을 잊지 말라(勿忘台灣)'며 타이완의 일본 시정 기념을 반대하는 전단지를 배포했습니다. 

이렇게 1923년 창단 이래 상하이를 중심으로 항일 운동을 벌인 상하이 타이완 청년회는 단체의 소재지를 상하이 조계지에 소재한 차이샤오간(蔡孝乾)의 주택으로 이동한 후 1924년 11월 ‘여호타이완동향회(旅滬台灣同鄉會)’로 개명해 계속해서 타이완 민족 해방 운동과 항일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1920년대 중반, 상하이에는 앞서 설명한 타이완청년회 외에도 일제에 반대하며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타이완 단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1925년 5월에 설립한 ‘타이완자치협회(台灣自治協會)’, 타이완과 조선 청년들을 주축으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해 조직된 ‘평사(平社)’, 1924년 6월 한국의 임시정부 회원들과 ‘타이완청년회’, ‘타이완자치회' 등이 연합전선을 구축해 타이완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외친 ‘타이완한국동지회(台韓同志會)’, 1925년 설립된 ‘상하이타이완학생연합회(上海台灣學生聯合會)’, 1927년 설립된 ‘독서회(讀書會)’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한국과 타이완 청년들이 상하이에서 연합으로 조직한 ‘타이완한국동지회'가 눈길이 가는데요. 1920년대 중국에서는 상하이 뿐만 아니라 베이징에서도 타이완과 한국 청년들이 함께 조직한 ‘한국타이완혁명동지회(韓台革命同志會)’가 있었을만큼, 반제국과 민족자결운동을 주창했던 두 식민지 청년들의 연합 활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4년 ‘상해지역의 대만출신 항일운동진영의 정황'을 전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1924년 1월 19일자 한 보도에 따르면 “상해애 머무는 타이완의 각계인사는 일전에 보산로(寶山路) 북쪽에서 비밀대회를 소집하여 자치요구를 운동하는 동지 60여 인을 체포한 일에 대하여 대책을 토론한 바, 많은 주장은 타이완이 왜인(倭人)의 통치가 된 후로 30년이 경과한 진상을 편찬, 출판하여 각국에 전하고, 민족자결주의를 근거하여 세계인류의 동정의 원조를 구하고자 하여, 장차 실행하게 될 터이라더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1920년대 당시 임시정부와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타이완의 항일운동세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6년 조선일보에서도 ‘타이완독립운동(臺灣獨立運動)’ 제목의 기사에서 안재홍은 타이완에 독립운동이 발각되어 중견인물이 도쿄의 경시청에 검거되었단 소식을 전하면서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의(有意)한 자와 연락하여 자못 조직적인 계획이 있었다 하니, 현대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의 필연한 궤도를 밟음이라 하겠다”는 논평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한국과 타이완 사이에 일제 식민통치와 약소민족이라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과 타이완의 연합 항일운동세력에 대해 연구한 역사학자 한상도씨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을 구심점으로 한 두 세력간의 연대에는 부득이하게 ‘중화질서로의 회귀'라는 관성이 기저에 깔릴 수 밖에 없었다고 분석하는데요. 그럼에도 일본의 식민지이자 중국의 변방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된 타이완인과 한국인 사이의 연대는 동병상련이란 감정을 기초로 구축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타이완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연대로 1930년대 말 조선의용대와 타이완의용대 간의 연대활동 중 조선의용대의 한 필자가 타이완의용대에게 보낸 서신을 인용하며 <대만주간신보>를 마칩니다. 

“조선에서는 민족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반드시 대내적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해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기타 약소민족과 연합하여 공동 분투하여야 한다. 타이완도 이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국가관계상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李達 “一封信” 《朝鮮義勇隊》12(9) 1939.5.11, 한상도 2006:172 재인용)

 

참고문헌

한상도 "일제침략기 한국과 대만 항일운동세력의 국제연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9, 2006, 169-214.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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