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시 둔화베이루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중산베이루 2단의 리젠트 호텔, 신이취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 등, 유명인이나 국빈이 타이완에 방문할 때 묵을 수 있는 5성급 이상의 호텔들을 지금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기였던 100년 전만해도 식민지 타이완, 타이베이에 외빈을 접대하거나 그들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딱 한 곳 있었습니다. 바로 철도호텔(데츠도호테루, 鐵道ホテル)입니다.
철도호텔은 190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위치는 타이베이 표정(오코테초, 表町)에 2정목으로 지금의 타이베이 228공원 북쪽과 타이베이 기차역 사이의 구역입니다. 철도호텔뿐만 아니라 각종 은행들(勸業銀行, 華南銀行)이 이곳에 설립되어 표정(오코테초)는 '타이베이의 금융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도호텔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5년 5월 31일, 미군의 폭격기가 타이베이 시내에서 폭탄을 떨어뜨리자, 표정 2정목에 있던 철도호텔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철도호텔이 폭파된 이 날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타이완 북쪽이 받은 가장 심한 폭격이었다. 타이베이 기차역에서 신공원까지 금융가의 고층 빌딩 전체가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타이완 총독부 및 주변의 타이완은행, 현재의 국방부가 소재해있는 부속 도서관, 타이완 병원, 타이베이 제1고등여학교, 법원 등 일제시기 타이베이의 중심가가 모두 폭격을 받아 적지 않은 관원들도 사상했지요.
1908년부터 1945년까지 37년 동안 타이베이의 귀빈들이 방문했던 철도호텔은 일제시기 내내 타이완의 여관, 호텔 중에서 가장 화려함과 찬란함을 유지하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철도호텔은 일본 정부, 즉 타이완 총독부 교통국이 직영한 관영 호텔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부의 관영에 의해 호텔을 짓기 시작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일대 유명 큰 호텔들의 공통된 특징이었죠. 일본이 물러나고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에 내려온 후 설립한 원산호텔(圓山大飯店)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제스 총통의 어의이자 전 원산호텔 회장인 슝완(熊丸, 1916-2000)은 과거 중앙연구원를 방문해 “타이베이 원산호텔을 건설하는 것은 처음부터 총통의 뜻이었는데, 당시 외빈은 매우 많았으나, 그들을 대접할 만한 변변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식민지 타이완의 철도호텔로 돌아오겠습니다. 철도호텔이 지어진 1908년 무렵은 일본에서 기존 막부 세력과의 전쟁에서 이긴 신군부들이 1868년 메이지 신정부를 설립하고 서구화의 길로 나아가던 중이었습니다. 1871년에서 1873년에 이와쿠라 사절단을 유럽과 미국의 각 국가로 파견해 그 나라의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웠죠. 메이지 유신의 분위기 아래서 일본 도쿄에도 1890년 히비야 공원 맞은편에 제국호텔(데이코쿠 호테루, 帝国ホテル)이 준공하죠. 일본에 방문한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일본 제국의 대표 숙박시설로서 최대한 화려하고 기품있는 서양식 호텔을 선보이며 일본의 서구화 행보를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호텔은 부를 얻기 위한 상업시설이기보다는 국가의 상징 중 하나였습니다.
타이베이의 철도호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 타이완의 근대화, 서구화된 모습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것이죠. 타이완의 첫 호텔인 철도호텔은 그렇게 타이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되었습니다. 철도호텔도 각종 광고를 통해 “본도의 유일한 서양식 호텔(本島唯の洋式旅館)”이라고 선전했죠. 호텔의 외관은 붉은 벽돌로 되어 있어 영국식 엘레강스함을 보여주고, 호텔 내부는 높은 천장과 샹들리에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타이완의 진보와 서구화를 상징하는 결정체가 바로 철도호텔었죠. 타이완 역사학자 린헝다오(林衡道, 1915-1997) 교수는 “당시 철도호텔의 모든 부속품들은 모두 영국제 수입품으로 전등, 나이프와 포크, 화장실의 작은 변기 등 모두 영국제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타이베이 철도호텔을 관장하던 지배인 중 한 명인 후쿠시마(福島篤也)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영어를 구사하는 전문 매니저로 호주 멜버른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호텔에 입사해 일본과 조선의 서양식 호텔에서 근무했습니다.
철도호텔을 이용해본 적 있는 타이완 사람들의 기록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 주일본대표처 공보처장인 장차오잉(張超英, 1933-2007)은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으로 그는 어렸을 때 할머니가 자신을 데리고 철도호텔 식당에 자주 갔던 것을 기억하며 “그곳은 매우 고풍스럽고 커피잔이 매우 작았으며, 희귀한 푸딩을 먹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명문가인 반차오린가(板橋林家) 출신의 역사학자 린헝다오도 일찍이 철도호텔 식당에서 식사한 기억을 떠올리며 “양식을 먹고난 후 과일을 내놓을 때 손을 씻는 작은 그릇도 곁들여져 있었는데, 모두 영국 빅토리아 왕조의 풍채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당시 호텔 숙박비가 1인 1실에 17엔으로 전문대 졸업생의 한 달 월급에 상당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당시 일본 철도성에서 펴낸 <관광지와 서양식 호텔>(観光地と洋式ホテル)에 따르면, 1930년대 타이베이 철도호텔의 가격은 1인실 3엔부터 16엔, 2인실은 8엔부터 27엔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저렴한 3엔짜리 1인실조차 당시 일반 타이완 사람들에겐 너무나 큰 금액이었기에 철도호텔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타이완 사람들은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의 최초 서양식 호텔인 철도호텔은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여관이 없었다면 타이완에서의 역사적 인물의 행보들을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14년 타이완인도 마땅히 일본인과 정치권력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이념 하에 타이완 지식인 린셴탕(林獻堂)은 이곳 철도호텔에서 ‘타이완동화회’(臺灣同化會) 단체 창립식과 강연을 가졌습니다. 당시 무력 항일 시위가 잠잠해지고 난 후 일어난 비교적 유연한 항일 활동이었죠. 또한 1919년, 타이디엔(타이완 전기) 주식회사가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1936년에는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위다푸(郁達夫)가 타이완 방문하여 ‘중국문학의 변천(中國文學的變遷)’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며 타이완 문단에 성대한 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하였습니다.
캐나다 국적의 선교사 맥케이는 1872년의 자신의 일기에 일제시기 이전 타이완 여관의 풍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베개 대신 돌을 사용하고, 창문이 없고, 지붕이 5피트도 되지 않아 똑바로 설 수 없으며, 대나무 침대가 있는 방에는 거미와 쓰레기, 가마꾼이 버린 누더기가 도처에 널려 있다”고요. 그로부터 약 30~40년 뒤 타이베이에 우뚝 솟은 철도호텔은 변화된 타이베이 도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참고문헌
陳柔縉, 台灣西方文明初體驗, 臺北市 : 麥田出版, 2005.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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