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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 풍경(南國風景)에서 현대 도시로, 타이베이의 도시화

  • 2023.03.21
대만주간신보
‘타이완 근대 미술의 선구자’라 불리는 서양화 화가 이시카와 긴이치로가 그린 타이완 총독부(왼쪽), 타이완 농촌 길을 그린 (오른쪽 위), 타이완 산지 풍경을 그린 (오른쪽 아래)

지난 주 이노 카노리, 토리 류조, 모리 유시노스케 등 일본 인류학자들의 타이완 원주민 답사 과정과 그 연구물들을 살펴보며 일본인이 어떻게 타이완 원주민들과 조우했는지 살펴보았는데요. 이번 주에는 일명 “타이완 미술계의 아버지”이라고 불리는 서양화 화가 이시카와 긴이치로(石川欽一郎, 1871-1945)의 시선을 통해 현재 타이완의 수도인 타이베이의 도시화 과정을 들여다봅니다.  

흔히 타이완 역사에서 이시카와 긴이치로는 근대 타이완 미술 교육과 미술 발전사의 중요한 인물로 소개됩니다. 타이완 미술사의 발전적인 측면 말고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일제시기 초 타이완, 특히 타이베이 도시의 변화 과정을 그림과 글로 생생하게 묘사한 이시카와 긴이치로의 시선과 관점입니다. 이시카와는 타이완의 자연경관을 그린 풍경화나 타이완인을 묘사한 인물화를 통해 소위 타이완의 향토색을 미술 분야에서 주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을 통해 현대적 도시로 개발 되기 전 타이완 곳곳 산지의 자연 풍경이 중요한 역사적 증거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100여년 전, 타이완의 풍경이 ‘어둠’에서 ‘문명’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목격한 그는 ‘남국(南國) 풍경’에 대한 여러가지 관점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이시카와 긴이치로(石川欽一郎, 1871-1945)의 시선

일본 시즈오카현(静岡県) 출신 서양화 화가인 그는 타이완 총독부 육군참모본부의 통역관 신분으로 1907년 처음 타이완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타이완에 온 첫 서양화 화가입니다. 타이베이사범학교와 타이베이국어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한편, 총독부가 타이완 산지 토벌 상황을 점검하는 데 동원되어 번역과 기록 일을 도왔습니다. 1907년 이시카와가 총독부 통역관으로 부임할 무렵은 한인들의 무력 반란은 어느 정도 정리한 총독부의 다음 시정 방침이 고산 지대의 ‘생번(生番)’, 즉 원주민을 ‘소탕’하는 것으로 옮겨가던 시기였습니다. 마침 타이완 총독이었던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 1844-1915, 1906-1915 재임)는 타이완의 고산 자원이 일본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처음 타이완에 도착한 화가 이시카와에게 타이완은 ‘천국’이었습니다. 이시카와는 총독부가 일본 고위층에게 대만 산지의 토벌 상황을 설명하는 데 협조하기 위해 총을 멘 20여명의 군경의 호위를 받으며 타이완의 깊은 산 속 곳곳에 들어가 설산(雪山), 신고산(新高山, 현 옥산玉山) 등 타이완 고산의 자태와 원주민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타이완 고산 풍경을 그림으로 남긴 최초의 인물이었죠. 그의 그림 중 일부를 사쿠마 타이완 총독이 직접 메이지 천황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시카와가 그림에서 묘사하는 1910년 전후의 타이완, 즉 남국(南國)은 원주민, 토적 등 치명적인 위협으로 가득차고, 교통, 위생, 치안 등은 낙후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산되는 타이완 특유의 원시적인 활력은 일본 본토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남국의 절경’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신분과 직책을 이용해 두 차례 산을 넘고 넘어 원주민 외에는 인적이 거의 드문 산지로 몸을 담았다. 이런 여행 스케치 방식은 기존 화가들은 상상하기 힘든 작업 방식이었다.

또한 타이베이에 거주하며 신식 건물을 그려 일본의 식민지 치적을 선전하는 일도 했지만 화가 개인으로서의 생활은 주변의 이국적이고 자연적인 풍경, 농가 등 “순수한 타이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전근대적인 풍경을 담아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1908년 이시카와는 ‘수채화와 타이완풍경’ 이란 글을 통해 자신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섬의 풍경은 실로 자연이 창조한 걸작이며, 규모가 웅대하고 색채가 웅장하며, 변화의 교묘함에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한다.” (石川欽一郎, 1908)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일본 화가들에게 타이완을 여행하며 스케치할 것을 권장했고,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감상해야 타이완 특유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던 화가 이시카와는 약 10년 후인 1916년, 타이베이 거리에서 일종의 타이완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하기 시작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타이베이 도시 곳곳에 세워지는 다양한 건축물을 통해 타이완 특유의 ‘지역사회’의 쇠퇴를 감지하고 ‘현대도시’로 탈바꿈 되고 있는 과정을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이베이는 교토와 매우 닮았다. 지세가 평탄하고 언덕이 없다. (…) 스케치 장소의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매우 풍부한 화제를 머금었다. 그러나 모두 타이베이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 지역의 풍경 이야기다. 타이베이 중심부에 있었던 오래되고 흥미로운 타이완식 건축물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분리주의적인 3층 벽돌 건물로 개조되는 중이다. 이렇게 우리의 영역이 지워지고 있다.” (石川欽一郎, 1916)

잠시 타이완을 떠났다가 1924년 다시 타이완에 돌아온 이시카와는 1회 타이완미술전람회(1927년, 조선미술전람회는 1922년 시작) 를 기획하고 추진하며 타이완 미술계에 유례없는 대형 미술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타이완을 찾은 이시카와의 눈 앞에는 완전히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처음 대만을 방문했을 때 그가 감탄했던 타이완 풍경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총독부의 도시 계획으로 다이쇼 시기(1912-1926) 타이완은 도로, 철도, 수도, 전기, 의료, 교육 등 각종 인프라 건설과 함께 새로운 현대식 도시로 탈바꿈되고 있었습니다. 타이베이는 곧고 넒은 거리로 대체되었습니다. 급속한 문명화 과정에서 사람, 도시, 풍경 모두 서서히 일본 본토와 비슷해지고 있었습니다. 식민 지배자의 눈에는 ‘진보’라 여길만한 각종 상징이나 업적이 이시카와의 눈에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대만일일신보』에 짧은 글과 함께 일련의 삽화를 연재하며 타이완의 현대화 과정을 통해 펼쳐진 새로운 풍경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내가 가장 많이 여행한 때는 메이지 말, 다이쇼 초기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직 근대화지 않은 순수한 타이완의 모습이었다. 당시엔 한눈에 봐도 오래되고 아름다운 경치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타이완을 걸으니 도처에 아무런 특색도 보이지 않아 유감이다” (石川欽一郎, 1935)

타이베이의 도시화, 현대화

일제시기 타이베이는 현대도시로 탈바꿈 되고 있었습니다. 『현대 타이베이의 탄생 』(2020, 원서는 2010년 출판)이란 책을 쓴 수숴빈 사회학 박사이자 전 국립타이완문학관 관장은 청나라인 제국 중국이 아닌 일본 식민지 시기, 특히 1905년 이후 타이베이가 ‘하나의 도시’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타이베이의 도시화는 인구 증가나 시가지 확장 같은 ‘자연적 현상’의 결과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간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현대 권력의 ‘사회적 산물’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타이베이 현대 도시 공간의 출현은 물리적 경관의 변화, 더 나아가 사회적 경관의 변화였던 것이죠. (수숴빈, 2020:303)

1905년 이후 대중이 사용 가능한 공공 장소들이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먼저 공원이 등장했습니다. 1908년에 완공된 타이베이공원(현 228공원의 전신), 1927년 만든 용산사 공원, 1932년 설치된 가와바타川端 공원(현 공관公館) 등이 그 예입니다. 도시 곳곳의 공공의 공간은 점점 신식 상업 활동과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기쿠모토(菊元) 백화점이 개업했습니다. 현재 시먼(西門) 주변입니다. 백화점은 콘크리트 구조의 7층 건물로, 당시 총독부 다음으로 높은 건물이었으며, 타이완 최초의 상용 엘리베이터가 이곳에 설치되었습니다. 전통적 지역사회의 소멸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박물관입니다. 원래 청나라 시기 타이베이 성내에 세워진 천후궁(天后宮) 자리에 천후궁을 헐어버리고 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이를 수숴빈 학자는 “민간 저변에 넓게 퍼져 있는 신앙인 천후 마주를 헐고, 인간의 통치를 기념하는 곳을 바꿔버렸다”고 표현합니다. 이 박물관은 현재 타이베이 도심의 228 평화기념공원 북단에 자리하고 있는 국립타이완박물관(國立臺灣博物館)으로 이름만 바뀐 채 여전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원 안에 천후궁의 주춧돌이었던 작은 의자들과 함께 말이죠. 

삼선도로(三線路)

타이베이의 도시화, 현대화를 대표하는 곳은 바로 삼선도로(三線路)입니다. 삼선로라고 불린 삼선도로를 통해 타이베이는 본격적으로 서구의 바둑판식 도시 계획에 따른 하나의 도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완 총독부는 청나라 시기 설립된 타이베이 부성의 성곽을 철거한 공간을 이용하여 성벽의 원래 자리에 동서남북 4단으로 넓은 간선도로를 설치했습니다. 지금의 중산남로(中山南路), 애국서로(愛國西路), 중화로(中華路), 충효서로(忠孝西路)입니다. 총독부와 타이베이 공원을 중심으로 곧게 뻗은 현대식 도로를 설치해 타이베이 도시의 중심지를 못박았습니다. 1913년 이후부터는 삼선도로 주변에 가로수를 심어 화려한 경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역에는 총독부와 공원뿐만 아니라 총독부 법원, 타이완은행 본점 등 고위 정부기관 및 중앙사무구역이 되었습니다. 삼선도로를 설계한 건축가 오쓰지 구니요시(尾辻国吉, 1883-?)에 따르면(1941), 삼선로 개념의 모델은 독일 연방의 라이프치히 산책로였다고 합니다. 유럽풍 거리 형식이 일본 도시 설계자에게 미친 영향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삼선도로를 통해 블록화된 이 구역은 오늘날 타이베이 시내 도로 시스템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삼선도로를 예찬하는 유행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1933년 발표된 ‘월야수(月夜愁)’입니다. 주첨왕(周添旺)이 작사, 등우현(鄧雨賢)이 작곡하고 린쓰하오(林氏好) 부른 이 노래는 삼선도로를 언급하며 타이베이 도시 한복판에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합니다. 

“달빛이 삼선로를 비추고, 바람은 살랑거리며 불어온다. 기다리는 사람아, 어떤 미래야, 마음은 의뭉스럽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니, 그 사람아, 아, 원망하고 원망하네” 

1937년 발표된 유행가인 ‘삼선로(三線路)’는 “삼선로의 달이 둥글다. 사랑이 달콤하고 달이 가득한 첫사랑의 그때, 꽃이 활짝 피어올라 설렌다. 아, 사랑은 달고도 쓰다”라고 노래하며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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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기지로 설치된 청나라 성벽이 사라지고 점차 도시화, 현대화되어는 일제시기 타이베이 시가지에서는 새로운 풍경과 정서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이시카와 긴이치로 화가는 타이완 특유의 풍경과 공간이 사라지고 있는 과정을 개탄했지만, 총독부의 철저한 개량과 수치화에 따른 계획 하에 건설되기 시작한 현대도시로서의 타이베이는 지금까지 그 면모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타이베이 중심에 위치한 타이베이시의 가장 넓은 공원인 다안삼림공원 역시 사실 1932년 총독부의 도시계획도에 제7호 공원으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일제시기 총독부의 도시계획을 두고 수숴빈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성과 과학의 힘은 시간을 뛰어넘었다. 일본 식민 통치자 수중에 있었던 타이베이가 그 증거다. 계획할 수 있고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도시. 7, 80년 전의 수치가 여전히 작용하는 현장을 보며, 지식 통치의 위력을 깊이 실감한다.” (수숴빈 2020:299)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참고문헌

수숴빈. 『 현대 타이베이의 탄생: 보이지 않는 타이베이와 볼 수 있는 타이베이』. 부산: 산지니, 2020. (원서: 蘇碩斌. 看不見與看得見的臺北. 臺北市: 群學, 2010.)

石川欽一郎. 1908. 水彩畫與台灣風光. (風景心境 : 台灣近代美術文獻導讀 / 顔娟英譯著 ; 鶴田武良譯. 初版. 臺北市: 雄獅, 2001, 30-31.)

石川欽一郎. 1935. 台灣風光的回想.  (風景心境 : 台灣近代美術文獻導讀 / 顔娟英譯著 ; 鶴田武良譯. 初版. 臺北市: 雄獅, 2001, 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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