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설인 춘절이 되면 타이베이 도심은 한산해집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작년 하반기부터 타이완도 위드 코로나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한동안 못봤던 외국인 관광객들이 타이베이 도심을 지나다니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조용했습니다. 게다가 춘절이면 타이베이 곳곳의 식당들도 대부분 영업을 중지합니다. 그런데 타이베이 동쪽 신이취(信義區)에 우뚝 솟은 산에는 춘절에도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요. 바로 타이베이의 인기 등산 코스 사수산(四獸山)입니다. 사수산의 ‘사수’는 바로 ‘네 가지 동물’을 의미하는데요. 사수산에 숨어있는 네 가지 동물은 바로 호랑이(虎), 표범(豹), 사자(獅), 코끼리(像)입니다. 각각 해발 142, 142, 151, 184 미터인 산의 정상은 그리 높지도 않은데다가 타이베이 최대 상권인 신이취(信義區)와도 인접해 있어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이베이 산 중 하나입니다. 호랑이산인 후산(虎山)은 타이베이 지하철 파란선 허우산피(後山埤)역에서 가깝고요. 코끼리산인 샹산(象山)은 타이베이 지하철 빨간선 샹산(象山)역 2번 출구에서 도보로 15분만 걸어가면 바로 등산로 입구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호랑이산인 후산은 다른 어느 정상보다 나무가 울창한 데다 주변에 유명한 절도 많아 타이베이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죠.
산이 험하거나 높지도 않은데 왜 하필 사납고 덩치가 큰 동물인 호랑이, 표범, 사자, 코끼리일까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청나라 초기 정성공이 타이난에서 군을 이끌고 북상해 타이베이의 네 봉우리를 보니 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와 표범, 사자, 코끼리 등 네 마리의 신수(神獸)를 다루는 신화와 같은 다양한 모양이어서, 사수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산봉우리가 영묘한데다가 풍수도 매우 좋다고 하네요.
타이베이 사수산 산행은 무거운 등산 장비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산 둘레길을 걷는 느낌으로 가벼운 옷차림과 가벼운 마음만 챙겨가면 충분합니다. 호랑이산, 표범산, 사자산, 코끼리산 순으로 점점 높아지는데요. 가장 낮은 호랑이산에서 출발해도 좋고, 가장 높은 코끼리산에서 출발해도 좋습니다. 저는 이날 호랑이산에서 출발하기로 마음을 먹고 지하철 파란선 허우산피(後山埤)역에서 내려 산 입구로 향했습니다.
각종 절을 지나 등산로에 들어서자 푸른 나뭇잎이 태양뿐만 아니라 도심의 소음을 가린 채 오로지 산행에 집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역에서 한 30분 정도 걸었을까요? 머지 않아 호랑이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호랑이산에는 흥미롭게도 해시계가 놓여져 있는데요. 다른 정상에는 없고 오로지 호랑이산에만 있습니다. 해시계에서 눈길을 바깥쪽으로 돌리자 저 멀리 101 타워와 주변 고층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호랑이산에서의 경치를 뒤로 하고 야오츠궁(瑤池宮)이란 절을 지나 표범산을 향해 걸었습니다. 둘 다 해발 142미터로 동일한 높이의 표범산과 호랑이산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표범산은 호랑이산에 비해 햇빛이 거의 들지 않고 녹음이 더 우거져 있습니다. 세 번째 산인 사자 산으로 향하는 길 중턱에 피어있는 빨간 꽃이 인상적이었는데요. 꽃잎은 없고 얇고 긴 꽃대가 여러 개 솟아 있는 모양의 빨간 꽃이었습니다. 마치 밤송이를 빨갛게 물들인 듯한 모양이었죠. 한국에서는 하와이안 자귀나무 꽃이라 불리는 이 꽃의 학명은 칼리안드라 테르게미나 에마르기나타(Calliandra tergemina emarginata)입니다. 라틴어로 에마르기나타는 ‘가장자리가 없는’(emarginata), 그리고 칼리안드라는 ‘아름다운 수술’(calliandra)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꽃잎 없이 수술과 암술만 남아 있는 형태죠.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꽃이라 아시아에서는 주로 오키나와와 타이완에서 사시사철 볼 수 있는데요. 구정 연휴였던 이 날 나름 겨울인 타이베이 산 중턱에서 이 꽃을 바라보는 소확행이 참 좋더군요.
사자산을 찍고 마지막 산인 코끼리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베이싱바오궁(北星寶宮)이란 절이 있습니다. 타이베이의 다양한 사원을 가봤지만 유독 미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져 등산길을 잠시 멈추고 들어가 보게 되더군요. 타이완 사원 특유의 밝은 붉은색이 채도가 낮은 황금색을 바탕으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춘절 기간이어서인지 사원 앞 입구를 지키는 돌사자(石獅子) 조각상의 목에는 붉은 꽃이 달린 목도리가 둘러져 있어 사원을 더욱 환하게 밝혔습니다. 사원 밖 지붕위에 높인 다양한 모양의 용과 사원 안쪽 지붕위로 빼곡히 조각낸 장식도 눈에 띄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수산의 가장 유명한 명소 코끼리산은 101타워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호랑이산에서 시작해 코끼리산으로 가는 길 각 정상에 올라 101타워를 점점 더 가까이 마주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아! 사수산을 그저 등산 코스로만 알고 계신다면 큰 착각입니다. 처음으로 소개한 호랑이산인 후산에는 연말이 되면 음악 축제가 열리는데요. 바로 후산음악제(虎山音樂祭, Tiger Mountain Ramble)입니다. 호랑이산 트랙킹 길에 숨어 있는 야외 공간에서 진행되는 후산음악제는 타이베이에 사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야외 광장에는 락밴드를 위한 가장 큰 무대가 있고, 무대 맞은편 좁은 산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디제이가 틀어주는 EDM에 맞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다른 한 켠의 옛 사원 건물 안에서는 힙합 댄서들의 즉흥 춤사위도 엿볼 수 있고요. 가뜩이나 해가 금방 지는 12월 겨울 밤, 과연 이런 곳에서 음악제가 열릴까라고 생각될 만큼 산 속으로 제법 깊이 들어가야 나오는 곳에서 음악 무대 외에도 수제맥주와 칵테일, 그리고 스페인, 멕시코, 미국, 인도, 등 각종 나라의 길거리 음식들도 맛볼 수 있는 국제적인 장터가 열립니다. 친환경 예술 활동을 지향하는 웨이위안문화예술재단(微遠文化藝術基金會)에서 2014년부터 개최한 후산음악제는 녹음이 우거진 산 속 숨은 공간에서 타이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옛 사원 건물과 더불어 음악과 음식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독특한 음악제입니다.
도심의 소음에서 잠시 멀어져 산길을 걸을 수 있는 데다 중간중간 산 정상에서 보는 타이베이 중심지 신이취(信義區)의 고층 빌딩 경관이 장관인 사수산. 타이베이 도심에서 멀지 않아 공원보다는 보다 삼림이 울창한 곳에서 가볍게 산책하고 싶을 때 안성맞춤입니다.
엔딩곡으로는 2022년 후산음악제 출연했던 유일한 타이완 밴드 88개 구아바씨(八十八顆芭樂籽, 88balaz)의 ‘오늘 하루도 살아남은 걸 축하해’(恭喜你又活下來了一天)입니다. 한국의 크라잉넛이 연상되는 88개 구아바씨는 1996년에 결성해 올해로 벌써 27년차 된 타이완의 대표 인디 펑크락 밴드입니다. 2022년 후산음악제 당일,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잘게 쪼개지는 이 곡의 드럼 비트에 맞춰 우비를 입고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게 춤을 추던 어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 뒤에서 더욱 격렬하게 몸을 흔들던 어른들이 떠오르네요. 이 노래 제목처럼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으신걸 축하드리며, 지금까지 <어반 스케처스 타이베이>의 진행자 서승임이었습니다.
- 서승임 徐承任 (seungim@rti.org.tw)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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