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 4대 의사-조명하 의사와 타이완- 김상호 교수 인터뷰
-2022.10.17.-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
한반도가 일제강점기 시기에 여러 애국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주권을 수복하고 국가의 독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헌신했었는데 수
많은 유명한 독립 열사와 의사들이 있는데 한반도나 중국대륙에서 행해진 의거 외에 타이완 중부 타이중시에서도 1928년 5월14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대장을 척살하며 그해 시월 10일 타이베이시에서 순국한 조명하 의사가 있다. 조명하 의사 순국 94주기 추모식이 지난주 월요일 시월10일 타이베이 옛 형무소 유적지에서 거행되어 주타이베이한국대표부 부대표(홍순창), 타이베이한국학교 교장(심향순), 타이완 슈핑(修平)과기대 교수 김상호 등이 함께했다.
(2022년10월10일 오전 '조명하의사연구회'가 주최하고 주타이베이한국대표부가 후원한 '조명하 의사 순국 94주기 추모의식. -사진: 김상호 제공)
4년 전 조명하 의사 의거 기념대회가 타이베이에서 열릴 때 조명하 의사의 장손 조경환 씨를 취재했던 적이 있는데 인터뷰에서 조경환 씨는 그가 직접 만나볼 수 없었던 할아버지 조명하 의사를 비롯해 나라를 지킨 분들은 모두 소중하다고 말씀하
신 게 매우 감명 깊었다. (2018년5월 타이베이 한국학교에서 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 기념식에 조명하 의사의 장손 조경환 씨가 참석했다. -사진: jennifer pai백조미)
시월17일 타이완.한반도.양안관계에서는 1928년 타이중에서의 의거로 순국한 조명하 의사가 역사에서 잊혀질 뻔 한 것을 불굴의 의지로 연구해 진실을 밝혀낸 현 타이중 슈핑과기대학교 김상호 교수를 인터뷰했다.
김 교수는 사실 처음부터 조명하 의사에 대해서 알고 있지는 않았다. 2004년에 타이완에서 거행된 국제학술회의가 끝난 후 타이완의 교수로부터 한국인 학자, 교수들에게 ‘혹시 조명하 의사에 대해서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 자리의 한국인 학자 모두 조명하 의사를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타이완의 교수가 ‘한국사람이 어찌 조명하 의사를 모를 수가 있느냐”면서 ‘1928년5월14일에 타이중에서 의거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말해줬다’고 한다. 당시 김 교수는 한국인으로서 조명하 의사를 왜 몰랐을까? 라고 생각하며 쥐구멍이라고 찾아 들어가고 싶었던 심정이고, 그때부터 조명하 의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005년에 타이완 유수 출판사 위안류(遠流)에서 ‘타이완역사 사전’을 출판했는데, 1184쪽과 1185쪽에 ‘조명하 사건’이라고 적힌 걸 발견하고 내용을 읽어보니 김 교수가 아는 것과는 다른,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고, 알고 보니 그 내용은 일본에서 1938년에 쓴 ‘타이완 경찰사’ 내용을 타이완의 학자가 일본어 내용을 그대로 중국어로 번역해 ‘타이완 역사 사전’에 수록을 한 것이었다. 그 사전 내용을 보면서 사실을 밝혀 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김 교수는 2005년의 상황을 회고했다.
김 교수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면 학술회의를 통해서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여기면서 주타이베이한국대표부 대사님들과 만나는 기회를 빌려 ‘조명사 의사’라는 분이 계시니 학술회의를 가져야 한다고 부임하신 대사님들에게 수 차례 건의를 해왔었고, 개인적으로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마침 타이중시 소재 조명하 의사의 거사 장소에 기념비 또는 고시패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현지 지자체 문화국에도 앞뒤로 10년 정도 문의하며 쟁취를 하는 등 상당히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다 2018년에 타이중시 조명하 의사 거사 장소에 고시패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양창수 대사 시절에 이에 깊이 관심을 보이며 2017년5월 국립타이완대학교에서 조명하 의사에 관한 좌담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인 2018년에는 국제학술회의로 확대되면서 국립타이완사범대학교에서 정식 논문 발표와 평론 등이 이뤄졌다.
조명하 의사 의거와 관련해 한국 독립기념관에서도 중시하면서 이러한 학술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하며 국립정치대학교에서 학술회의를 거행하기도 했다.
2019년에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조명하 의사 동상을 세우며 좌담회도 개최하였다.
그래서 김상호 교수는 2004년에 우연히 타이완 교수의 말을 듣고 조명하 의사라는 분이 계셨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불굴의 의지로 조명하 의사를 더 많이 알리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홍보하며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뛰어오고 있다. 다행히 주타이베이한국대표부 대사의 참여를 끌어내면서 국제학술회의까지 열고 타이완과 한국의 언론에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음원-김상호 교수) 저는 2004년부터 (조명하 의사에 대해) 알게 되어 지금까지 계속 자료도 찾고 또 찾은 자료를 메스콤에도 배포하는 등 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김 교수의 애국심과 학자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점은 칭송 받을 만한 일이다.
조명하 의사가 순국한 날은 1928년10월10일이다. 당시 일본치하의 타이완 타이베이형무소에서 순국했는데 마침 이날은 중화민국의 국경일이기도 하여 당일 취재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 교수의 경우 1988년도에 처음 타이완에 와서 대학원에 다녔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타이완에 있으면서 매년 쌍십절 행사를 TV중계방송도 보아왔는데 조명하 의사를 알고 나서는 시월10일이 주는 의미는 달라졌으리라 생각된다. 김 교수는 약 10년 전부터 조명하 의사가 순국한 자리인 타이베이 중심가 소재 일본통치시기의 형무소 자리를 매년 시월10일에 찾아와 추모를 한다고 한다.
(음원-김상호 교수) 제가 조명하 의사를 알면서부터 한 10년전서부터는 제가 조명하 의사를 추모해야겠다 생각하고, 타이베이 구 형무소 자리에 저나, 아내와 자녀 등 가족끼리만 가서라도 꽃다발 하나 놓고 계속해서 한 10년 전부터는 계속 그걸(추모를) 하면서 아무래도 쌍십절 행사는 마침 오전 10시에 시작하는데 조명하 의사께서는 오전 10시12분에 사형이 집행되어 10시27분에 숨을 거두셨거든요.
타이완은 1895년부터 50년 동안, 한국은 1910년부터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 현 시점에서 볼 때 타이완과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월26일(화) 타이베이 토크에서 노혁이 작가와도 이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이 있어서 청취자님들께서도 이점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강점기에 타이완에서 의거하여 순국한 조명하 의사의 역사 진실을 밝혀낸 김상호 교수는 현시점에서의 일본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타이완인과 한국인에게 조명하 의사를 한두 마디로 소개를 한다면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들어보겠다.
(음원-김상호 교수) 저는 우선 한마디로 한다면 ‘역사를 잊은 민족은 희망이 없다’라는 말을 전제로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제가 강의 시간에도 학생들한테 얘기하지만 물론 학생들이 다 대만학생이고, 제가 한국인 교수로 한국인과 대만사람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방금 (백조미)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일본의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일본이 인정하는 걸 바라는 것이지 지금도 일본하고 원수처럼 지내는 건 저는 원치 않아요. 왜냐하면, 일본하고 지금도 젊은이들끼리는 왕래를 해야돼고, 말하자만 대만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바로 옆에 있는 국가들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고 서로 비교하면서 지내는 게, 잘 지내는 걸 저는 원해요, 사실…, 다만 원하는 건 과거의 일본의 행위에 대해서, 위안부 문제라든가, 그런 거에 대해서 (일본이) 인정을 하고 깔끔하게 인정을 하고 나가면 되는데, 일본정부에서는 그걸(인정과 사과를) 안 하지만요, (일본이) 그것만(인정과 사과만) 깔끔하게 하고 다시 합심해서 21세기를 같이 자유.민주 국가가 – 대만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 이렇게 자유 민주 국가끼리 같이 뭉쳐서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원하는 것은, 그걸 정치가들의 생각은 그걸 이용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조명하 의사는 이제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와 함께 4대 의사 반열에 올랐다. 앞으로 한국에서는 조명하 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믿어진다.
조명하 의사는 순국하기 전에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리라, 대한 독립 만세!’라는 유언을 남겼다. 1928년10월10일 오전 10시 12분에 사형되어 15분 후인 10시 27분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白兆美
취재,원고,보도: 백조미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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