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미식회시간입니다.
정극에서부터, 무협물, 로맨스물,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사극은 안방극장의 변함없는 흥행보증수표입니다. 그중에서도 여인들의 궁중암투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이야깃거리입니다.
그런데 흥행보증 장르인 온갖 음모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중암투물을 보면 이런 장면! 하나쯤 있습니다. 바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인들은 늘 몸을 튼튼하게 해준다는 약재를 달인 탕약 같은 걸 꾸준히 마시다 서서히 독에 중독되어 비통한 죽음을 맞이한다거나, 아님 황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누군가 보낸 다과나 음식을 먹곤 갑자기 독살되면, 언제나 똑부러지는 여자주인공이 짠! 하고 등장해서 독을 음식에 섞어 넣은 사람이 누구인지, 통쾌하게 배후를 밝혀내는 장면들입니다.
궁중암투에 단골 소재인 약. 약은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물질’이란 인식이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일반적으로 약은 안전하고 이로우며 독은 해롭고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약과 독은 둘 다 생물 활성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로, 약과 독은 사실상 서로 대립되는 별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둘이 다른 것은 단지 양의 차이일 뿐 독이라도 양을 더하거나 줄임으로써 약이 되고, 약으로 쓰이는 물질도 일정량을 초과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약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병을 고칠 때도 많지만,예부터 사랑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질투에 눈이 먼 자들이 상대방을 해하려는 목적으로써 안전한 약이 치명적인 독이 되어 사용된 일도 많았습니다.
오늘 랜선미식회시간에서는 알고 먹으면 명약이지만 또 반대로 모르고 먹으면 독이되는 인류사와 함께한 신비로운 약과 독의 세계로 떠나볼까요?
음모와 얽힌 암살 등 독살의 역사 속에서 독극물로 쓰였던 물질로는 살구씨가 있습니다. 전통 중의학에서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 부르고, 타이완에서는 ‘싱런ㄒㄧㄥˋㄖㄣˊ’이라 발음하는데요. <본초강목> 등 고전 의학서에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200가지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 쓰임새가 다양하고 훌륭한 약재로 정평이 나 있는 살구씨는 기침을 멎게 해주고 숨찬 증상을 호전 시킨다해서 예부터 은행 씨와 함께 기침, 가래 등 폐 질환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또 살구씨는 지방성분이 많이 함유돼어 있어 위를 편안하게 하고 장을 부드럽게 해 변비개선에도 좋고, 피로회복 효과와 빈혈 예방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또 살구씨(杏仁)에 함유된 리놀렌산, 올레인산 등의 불포화지방은 피부를 하얗게 해주고 윤기가 나도록 해주며, 기미와 주근깨를 제거해주는 등 피부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다만 이렇게 요긴한 약재인 동시에 살구씨는 중독의 우려가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중독을 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살구씨에 있는 아미그달린(amigdalin)이라는 청산배당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살구씨 속 아미그달린 자체로는 그렇게 해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효소작용에 의해 독성성분인 시안화수소(HCN)로 분해되어 이를 우리 몸이 과다 섭취할 경우 시안화수소 중독으로 구토, 간 손상, 혼수,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어 살구 씨는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이 살구씨가 독이 있다고 해서 겁낼 건 없습니다. 본초서에는 독성이 있는 살구씨의 뾰쪽한 앞부분을 제거하고 쓰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래도 살구씨에 중독될까 불안하다면 살구씨를 물에 담갔다 뜨거운 물에 팔팔 끊이면 살구씨의 독성이 완화되어 안심하시고 약재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모르고 먹으면 독이 되고, 이를 알고 적절하게 쓰면 약이 되는 살구씨를 타이완에서는 차로 달여 마십니다. 타이완에서는 ‘싱런차杏仁茶’라고 불리는 살구씨 차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우선 단 맛이 강한 살구씨 첨행인(甜杏仁)과 쓴 맛이 나지만 깊은 향을 내는 고행인(苦杏仁)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첨행인과 고행인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속껍질을 벗기고, 독이 있다는 씨의 뾰쪽한 앞부분을 제거한 뒤 쌀과 함께 갈아 놓은 다음, 미리 준비한 용기에 재료를 넣고 물을 부어 푹~끓이면 우유처럼 뽀얀 살구씨차, ‘싱런차’ 완성! 또 각자 취향에 따라 설탕을 넣어서 마시면 됩니다.
살구씨로 만든 싱런차는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타이완에서는 버블티(珍珠奶茶, 전주나이차)만큼 사랑받는 전통 음료수입니다. 한국의 전통 음료인 식혜나 수정과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타이완에서 대형 마트나, 야시장을 걷다 훅!하고 한국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독특하고 강렬한 향이 나는 곳에 만약 우유 같이 뽀얀 음료가 있다! 그럼 분명 타이완의 전통 음료인 ‘싱러차’일 거에요. 두유나 아몬드우유는 익숙하지만 살구씨로 만든 ‘싱런차’는 무슨 맛일까 궁금하시죠? 아몬드 우유와 두유가 고소하고 진하다면, 타이완의 전통 음료수 ‘싱런차’는 좀 더 부드럽습니다. 또 특유의 계피향이 수정과의 특징이라면 ‘싱런차’는 살구씨 특유의 은은한 향이 특징입니다.
16세기 스위스의 의학자인 파라켈수스(Philippus Aureolus Paracelsus)는 “모든 약이 독이다. 용량이 문제일 뿐 독성이 없는 약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독과 약은 한 끗 차이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 때론 사람을 해하기도, 또 반대로 살리기하는데요. 오늘 랜선미식회시간에서는 일정량을 초과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독이 되지만, 적당한 양이면 기침, 천식, 변비, 피부 미용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살구씨로 달인 ‘싱런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기침을 멎게 해주고 기관지에 도움이 되고 또 비타민 C와 유기산이 많아 피로회복과 갈증해소에 좋은 ‘싱런차’ 주말에 만들어서 가족분들과 드셔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으로 랜선미식회시간의 손전홍입니다.



Rti 중앙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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